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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HQ!!

[리에야쿠] 두 뼘 차이






두 뼘 차이

계간리에야쿠 6월호

w. 비누꽃

 

 

 



-동생아, 오늘 공강이지? 누나 노트북에 꽂힌 usb좀 학교로 가져다 줘, 사랑해!

 

평소처럼 사랑과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누나의 문자를 받고, 하이바 리에프는 침대를 뒹굴며 귀찮음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누나인 아리사와는 두 살 터울, 각자 다니는 대학은 집을 기준으로 서로 반대편에 있었다. 워낙에 사이좋은 남매이다 보니 시간표까지 꿰고 있는 게 문제였다면 문제였을까. 리에프는 대외적으로 아름답고 똑똑하고 완벽한 누나가 사실은 과제를 집에 두고 가는 게 다반사인 덜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지 궁금했다. 그래도 평소에는 프린트물을 두고 가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이메일로 과제를 보내주겠다고 해도 누나는 막무가내였다. usb에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있는지 비밀번호까지 걸어두고는, 아리사는 리에프에게 학교로 당장 와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고 보니 리에프가 아리사의 학교로 찾아가는 건 그녀의 입학식 이후 처음이었다. 늘 아리사가 몰래 리에프의 학교로 찾아오곤 했었고, 리에프는 아리사를 만나러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학교에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그 녀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야쿠 모리스케와 하이바 아리사는 경영대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이었다. 키는 남자인 야쿠 쪽이 165cm, 여자인 아리사 쪽이 178cm. 처음엔 키가 정 반대 아니냐고 뒤에서 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곧 그런 말들은 쑥 들어갔다. 작고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야쿠는 동기와 선후배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의지하는 경영학과의 인기인이었고 아리사는 총여학생회장이었던 작년, 신문에 날 만큼 이름을 날렸다. 어디를 봐도 헐뜯을 구석이 없는 조합이었다. 그리고 4학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리사가 야쿠의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캠퍼스를 걷는 것을 목격한 학생들은 입을 모아 그들이 졸업하자마자 결혼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 일이야 어떻게 될지 한 치 앞을 모른다지만 그들의 미래는 그렇게 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리에프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더 심사가 꼬이는 듯했다. 아무리 덜렁대도 여전히 완벽한 내 누나에게, 그런 별거 아닌 쪼끄만 놈이 들러붙어 있다니. 리에프는 무심코 걸음을 서둘렀다.


경영대학 건물 앞까지 걸어가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늘씬한 미인인 아리사는 언제나처럼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분수대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그 녀석.’ 리에프는 괜히 라이더 재킷을 한 번 더 여몄다. 어디, 어떤 놈이 잘난 누나의 옆자리를 꿰차고 있는지 내가 똑바로 봐 주겠어.


레보치카!”


완전히 다가가기도 전에 먼저 달려와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누나의 손길을 제법 단호하게 피하며 리에프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섰다.


누나.”

뭐야, 목소리 왜 그렇게 깔아.”


웃음이 섞인 아리사의 말에 리에프는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서 뒤쪽으로 옮겼다. 그 녀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나의 남자친구, 야쿠 모리스케.


인사해, 내 남자친구야. 너도 알지? 야쿠.”

…….”

모리스케, 얘가 내 동생이야.”


리에프는 아리사가 소개하는 말에 맞추어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눈에 들어온 야쿠는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이었다. 흰 셔츠에 파스텔 블루 색깔 카디건, 발목까지 떨어지는 핏의 검정 슬랙스. 그리고 손목에 단정하게 채워진 아날로그시계와 한쪽 손에 들고 있는 클러치. 깔끔하고 짧은 머리를 한 야쿠가 동글동글한 눈을 선하게 누그러뜨리며 리에프의 앞에 다가와 섰다. 리에프는 저도 모르게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인정하긴 싫지만 자신이 그동안 머릿속에 그려왔던 여유로운 선배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보다 두 뼘은 더 작은 것 같지만. 리에프의 고개가 삐딱하게 틀어졌다.


안녕. 반갑다.”


어떡할까. 리에프는 짧게 망설였다. 이 이상 누나의 남친에게 질투하는 건 너무 시스콤 같고 꼴이 별로긴 한데. 그렇지만 친근한 반말로 건네 오는 저 인사를 웃으며 받아주는 순간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 때, 옆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리사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리에프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

우리 동생,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안녕하세요.”


그러나 더 버티다간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누나의 화내는 모습을 보게 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조금도 경련하지 않고 말끔히 미소 짓는 아리사의 얼굴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리에프는 다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야쿠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더 커졌다.


야아, 너 진짜 잘 생겼다! 키도 완전 크네! 아리사,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멋진데?”


리에프의 콧구멍이 살짝 커졌다가 줄어들었다. 가감 없이 솔직한 목소리로 하는 제 칭찬에 그만 기분이 좋아져 버리려고 했다. 그는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더 낮게 깔았다.


누나. usb 여기. 밥은 먹었어?”

너 오면 같이 먹으려고 우리도 아직 안 먹었어! 모리스케, 얘 데리고 어디로 가야 좋지?”


대답하며 아리사는 묘하게 야쿠를 끌어당겨 리에프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둘은 시선을 마주치며 무언가 계획을 감춘 듯 비밀스럽게 웃었다. 리에프의 눈에는 그저 제 앞에서도 좋아 죽겠는 걸 못 숨기는 커플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동생과 눈이 마주치자 아리사는 눈웃음으로 수상한 눈빛을 감추며 야쿠의 팔짱을 꼈다.


나 과사무실 가서 조교한테 서류 한 장만 내고 올 테니까, 적당한 데 골라서 먼저 가 있어. 알았지?”

그래. 걱정 마.”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하는 야쿠와 아리사를 보며 당황한 건 리에프였다. 어색하고, 아직 완전히 마음에 든 것도 아닌데, 둘만 먼저 가라고? , 아리사! 오랜만에 누나라는 호칭 대신 이름이 튀어나왔지만 아리사는 손을 흔들며 팔랑팔랑 멀어졌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발걸음을 옮긴 건 야쿠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리에프를 잡아끌며 그와 눈을 마주치고 씨익 웃었다. 이유도 모르고 리에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결국 리에프는 야쿠와 단 둘이 점심을 먹었다. 아리사에게서는 서류에 뭔가 문제가 생겼으니 먼저 밥을 먹으라는 문자 한 통만이 왔을 뿐이었다. 학교 앞 치고는 가격도 있고 분위기도 괜찮은 경양식집에서 각자 주문한 음식을 먹는 동안 분위기는 생각보다 좋게 흘러갔다. 야쿠는 포크로 함바그를 적당히 자르다 말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여기 괜찮지?”

? . 저희 학교 앞에는 이런 데 별로 없거든요.”

사실 여기가 우리학교 소개팅 핫플레이스야. 지금도 다 커플이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리에프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말이었다.


야쿠상이랑 저 빼고는 진짜 전부 소개팅 느낌이네요.”


야쿠는 냅킨을 펼치며 그냥 웃었다. 왜지? 리에프는 묘한 분위기에 의아했지만 야쿠는 그뿐이었다. 물 흐르듯 다른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갔다. 그러나 리에프에게는 조금 전 눈만 들어 자신을 바라보던 야쿠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이 자꾸만 잔상처럼 눈앞에 남아 있었다.

 



* * *

 



우리, 바다 보러 갈래?”


한낮의 햇볕 아래서 아리사의 결 좋은 머리칼이 반짝거렸다. 리에프는 뜻밖의 제안에 저도 모르게 야쿠의 얼굴을 살폈다. 곧게 다물려진 입은 아직 아무런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기말고사가 막 끝난 6월 중순이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과제와 두 번의 시험을 치르면서도 리에프가 아리사의 학교에 발걸음 한 것은 벌써 네 번째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어영부영 누나 대신 야쿠와 단둘이 밥을 먹었고, 두 번째에는 셋이서 술에 진탕 취했다. 그리고 바로 지난주에는 아리사가 어디선가 빌려온 학생증으로 리에프까지 학교 도서관에 앉아 하루 종일 함께 시험공부를 한 참이었다. 그리고 오늘. 리에프는 어느덧 제 학교 선배보다 가까워진 야쿠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잡으며 그에게 물었다.


어떡할까요? 한 시간 정도만 운전하면 되긴 하잖아요.”


야쿠는 제 어깨에 얹힌 리에프의 손에 한 번 시선을 주었다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까다로운 전공시험을 마지막 날에 몰아서 치느라 고생했는지 야쿠의 얼굴은 꽤 까칠했다. 리에프는 문득 그게 안쓰러워져 저도 모르게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다 저 혼자 화들짝 놀라 팔을 등 뒤로 감추며 본능적으로 아리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어느새 조금 떨어져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핸드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전화 끝나면 다시 얘기해요. 누구랑 전화하는데 저렇게 신났지?”

있어, 친구.”


야쿠의 말투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쿨했다. 오히려 그는 제 여자친구가 아니라 리에프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눈빛을 그대로 받으며 리에프는 갑자기 너무 덥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손부채질을 했다. 곧은 시선을 느끼고 있으려니 어딘지 부끄러워져 애써 캠퍼스 여기저기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여전한 분수대, 벽과 게시판에 덕지덕지 붙은 종강파티를 알리는 대자보, 책과 프린트를 한 아름 안고 가는 학생들. 문득 곁에 선 야쿠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렇게 신기하게 둘러봐.”

.”

너도 똑같은 대학생이면서.”


그가 손을 뻗어 리에프의 등을 한 번 탁, 치고 천천히 떨어져나갔다. 리에프는 여전히 즐겁게 통화 중인 아리사를 한 번 돌아보고, 다시 웃고 있는 야쿠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어쩐지 초조해졌다. 제 마음의 여유는 그가 다 빼앗아간 것만 같았다. 리에프는 갑자기 시원한 바다가 그리워졌다. 초여름의 아지랑이가 그와 야쿠의 사이에서 어른거렸다.

 



* * *

 



결국 바다로 향하는 길이었다. 차 안 가져 왔는데하고 리에프가 말을 흐리자마자 야쿠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들었다. 운전 내가 할게. 그리고 그는 아리사가 벤치에 내려놓았던 책 한 묶음을 집어 들고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멍하니 그를 따라가려던 리에프를 아리사가 뒤에서 붙잡았다. 나 너무 피곤해서, 가는 동안 뒤에서 좀 잘게. 네가 모리스케 옆에 타. 힘들면 다음에 가지 그러냐고 리에프가 만류하자 아리사는 팔을 휘휘 내저으며 웃어보였다. 다른 날 잡으면 그게 종강 날 가는 거랑 같아?


레보치카, 넌 어떤 사람이 좋아?”


뒷자리에 눕듯이 늘어진 아리사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늦은 오후가 지나고 날씨가 선선해져 차창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리에프는 저도 모르게 야쿠에게 한 번 흘깃 시선을 주었다. 운전대를 잡은 야쿠는 앞을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저 사람이 당황하는 때도 있을까?


나는 좀 아담하고, 근데 성격은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쪽이 좋은데.”

아아. 너랑 정 반대가 좋구나.”


야쿠를 바라보며, 제가 생각하는 그의 모습을 이상형이라는 듯 털어놓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이상하다고 깨닫기도 전이었다. 홀린 듯 뱉은 말을 듣자마자 풉, 웃으며 받아치는 야쿠 때문에, 리에프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가, 내가 야쿠상 앞에서 촐싹거린 적이 있어요?”

키 얘긴데?”

, 진짜, 뭐야.”


뒷좌석에서 아리사의 웃음소리가 크게 터졌다. 박장대소하던 그녀는 곧 사레가 심하게 걸린 듯 기침을 시작했다. 그 기침소리 속에서 야쿠는 드디어 정면에 고정했던 시선을 리에프의 얼굴로 옮겨 주었다.


너 내 앞에서 한껏 의젓한 척 하길래. 오히려 더 잘 들여다보인다고 해야 되나, 아무튼.”

…….”


리에프는 말없이 팔짱을 꼈다. 야쿠도 더 말하지 않고 운전을 계속했다.

 



* * *

 



어떻게 할래? 여기까지 왔는데, 바다는 보고 가야되지 않아?”

. 야쿠상이랑 둘이 간다니 좀 낯간지럽긴 하네요.”

바다 보고, 회 먹자. 어때?”


리에프의 입술이 작게 튀어나왔다. 그의 제안이 싫지는 않았다. 누나의 오래된 남자친구니까, 같이 갈 수도 있지. 그런데 또 이상했다. 자꾸만그 이상의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야쿠의 눈빛과 말투가, 태연하면서도 조금 긴장한 듯한 입매와 손동작이, 데이트 하자고 하는 것 같, 아니야. 그럴 리가. 리에프는 야쿠를 앞에 두고 애써 고개를 도리질해 잡생각을 떨쳐버렸다.


차 안에서 어찌어찌 이야기가 진행되어 즉흥 바닷바람 쐬기 계획은 어느새 12일의 일정이 되어 있었다. 실컷 술도 마시고, 바닷가 펜션에서 편하게 자고 돌아가자고. 그러나 펜션에 들어서자마자 아리사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 버렸다. 그리고는 너무 피곤해서 일어나기 절대 싫다고 했다. 이불 속에서 우는 목소리를 내는 아리사를 두고 리에프는 한숨을 쉬었다. 누나가 한 번 싫다고 하면 말릴 수 없었다. 이불 위를 몇 번 토닥인 야쿠는 익숙하다는 듯 앉아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제안을 해왔다. , 리에프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럴 마음도 없었고. 둘은 펜션을 나서서 해변으로 난 좁은 길을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들은 노을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사장에 대충 신문지를 깔고 앉았다. 야쿠가 맥주 캔을 따는 동안 리에프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깔고 앉으라고 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오버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어쩐지 앉아 있는 그들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두 뼘, 한 뼘, 마지막에는 붙어 앉다시피 했다. 그러다 눈이 딱 마주쳤다. 야쿠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건 리에프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고 여겨지도록, 이상하리만큼 오랫동안,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저기요.”

.”


야쿠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리에프는 더 말하는 대신, 노을이 부서지는 야쿠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가락 두 마디, 한 마디만큼. 그러자 야쿠는 이상하다는 기색도 없이 마주 다가왔다. . 리에프는 그대로 멈추었다.


내가무슨…….”

안 될 거 없잖아.”


그러면서 야쿠의 손이 리에프의 뺨을 훅 잡아당겼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하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리에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당연히, 야쿠상은 누나 남자친구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면, 어때?”


뭐라고요? 둘 사이의 아슬아슬함이 흩어져 사라졌다. 리에프가 현실로 돌아오자 야쿠도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적당히 멀어졌다.


말 그대로. 사실은, 아리사가 먼저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근데 갑자기 그렇게 누워 버리고, 나한테 다 떠넘긴다는 뜻인가.”


야쿠는 가벼운 말투로 중얼거리며 웃었다. 심각한 건 저 혼자뿐인가 하는 생각에 리에프는 앞을 보고 앉은 야쿠의 어깨를 짚었다.


무슨 말이에요?”

아리사랑 난…….”


? 리에프는 그 다음을 기다렸다. 참을성 있게, 정적을 깨지 않으려 입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야쿠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무릎에 고개를 처박았다.


, 안 돼! , 난 절대 말 못 해.”

……이 사람이 진짜!”

다 알게 되면 너도 내가 왜 말 못한다고 하는지 이해할거야. 이건 전적으로 아리사의 프라이버시거든.”


리에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야쿠는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불안하게 흐트러진 감정을 내보인 차였다. 그는 야쿠의 어깨에 얹힌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이었다.


모리스케. 내가 너한테 너무 다 떠넘겼어?”


가만히 앉아 있던 둘의 등 뒤에서 아리사가 불쑥 말했다. 긴 그림자가 야쿠와 리에프의 위로 늘어졌다. 말짱한 얼굴로 걸어온 그녀는 그들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야쿠가 고개를 들었다.


아리사.”

분위기 보니까 잘되고 있던 거 같은데! 내가 말할게.”

누나?”

레보치카, 나 모리스케 말고 애인 따로 있어. 우리 학교에.”

……?”


리에프는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리야? 그의 바지에서 모래가 우수수 떨어지자 아리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좀 앉아봐. 리에프의 바지자락을 잡아당긴 건 아리사가 아닌 야쿠였다. 리에프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4둘이 4년 사귀었잖아.”

정확히는 4년 동안 사귀는 척 한 거야.”


야쿠의 목소리는 낮고 작게 잠겨 있었다. 리에프는 야쿠에게로 휙,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아리사가 말을 계속했다.


내 애인, 내가 아까 통화한 사람이야.”

누구, 아니 그 사람은,”

맞아. 여자! 나 여자 좋아해, 리에프! 캠퍼스에서 편하게 연애하고 싶어서 일부러 모리스케랑 사귀는 척했어.”

야쿠, 야쿠상은,”

나도 알고 시작했어. 왜냐면 나도, 편하게 연애하고 싶었거든.”


난 좋은 사람 못 만났지만. 야쿠가 가볍게 킥킥 웃었다. 아리사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지만 리에프는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둘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손을 갑자기 아리사가 꼭 붙잡았다.


미안해. 이제 와서, 여기서 갑자기 말하는 것도 그렇고, 매번 너 학교에 불러놓고 이상하게 군 것도 미안해. 근데, 나는 모리스케 같은 좋은 남자를 다른 놈한테 주기 싫었거든.”

……누나.”

, 네가 남자 좋아하는 거 알아! 아는 티 안 냈던 건, 나도 아직 내 얘길 털어놓을 준비가 안 됐어서. 우리 되게 친했는데, 그런 건 참 말 못했다, 그치.”


아리사는 미안한 얼굴이었다. 야쿠는 웃음을 지우고 리에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에프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아리사는 놓치지 않았다.


착한 내 동생. 누워서 생각해 보니까, 넌 내 남자친구를 건드릴 리가 절대 없는 거야. 그래서 뛰어왔어. 둘이 서로 끌리고 있던 거 알아. 맞지?”


꿀꺽. 리에프의 목으로 침이 넘어갔다. 그는 천천히 야쿠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턱을 괸 채 리에프를 곁눈질하던 야쿠의 눈길이 딱 멈추었다. 노을 때문인지, 묘하게 얼굴이 붉은 것 같았다.


, 대답 안 해도 알겠네.”


아리사는 리에프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회 포장 해 와! 그녀는 늘씬한 다리를 옮기며 마지막으로 한 번 뒤를 돌아보고 웃었다. 그제야 리에프는 학교에서 아리사와 야쿠가 주고받던 비밀스런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잠깐만, 누나!”


, 여기 이렇게 둘만 남겨두고 가면, 수습을 어떻게 하라고. 리에프는 문득 정신이 들어 후다닥 아리사를 따라 일어섰다.


가지 마.”


그러나 턱, 손목이 붙잡혔다. 야쿠가 리에프를 돌아보았다. 처음에 리에프는 올려다보는 눈빛이 평소처럼 잔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선을 마주치고 있을수록 그 안에서 어쩔 줄 모르고 소용돌이치는 감정이 들여다보였다. 리에프는 시선을 떼지 않으며 스르르 다시 주저앉았다.


그럼, 말을 해 봐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아리사도 갔는데, 아까 하던 거나 마저,”

, 진짜 태연하네요, 야쿠상은!”

그야, 애초에 내가 너 소개해달라고 했으니까!”


드디어 야쿠도 소리를 질렀다. 리에프는 그 말을 듣고 감정을 정리할 새도 없이, ,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야쿠가 제 손목을 놓아 버리자 이번에는 그가 야쿠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뭐라고요?”

, 그냥, 회나 먹으러 가자.”

아뇨, 갑자기 여기 계속 앉아있고 싶어졌는데요?”

나 너무 쪽팔.”


순식간에 그의 말을 막고 떨어져 나간 입술 때문에 야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리에프가 웃고 있었다. 그는 야쿠의 어깨를 제 쪽으로 감싸 끌어당기며 눈앞의 바다에 시선을 주었다. 야쿠도 더 말하지 않고 몸의 긴장을 풀었다. 간격이 다시 좁아들었다. 초저녁의 짭짤한 바닷바람만이 둘 사이를 스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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