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HQ!!

[카마후타/엔노후타] 각자의 겨울







각자의 겨울

카마사키 야스시 X 후타쿠치 켄지 X 엔노시타 치카라




w. 비누꽃









1.


별로 춥지도 않은데 자꾸만 따뜻하게 입었냐고 물어보는 게 귀찮았다. 후타쿠치는 현관 앞까지 나와 이런저런 걱정을 늘어놓는 엄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최대한 빠르게 집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었다.


사실 후타쿠치가 원래 날씨에 좀 무딘 편이긴 했다. 아직도 가을이겠거니 하고 대충 교복 재킷 바람으로 집을 나섰지만 어느새 싸늘해진 바람은 매섭게 그의 뺨을 할퀴고 얇은 교복 셔츠 사이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게 낯설어 아, 하고 멍하니 입을 벌린 순간 차가운 공기가 입 안으로 한가득 들어왔다가 흰 입김이 되어 빠져나가 버린다. 겨울 냄새에 코가 시렸다.


학교에 도착했을 즈음엔 이미 시리고 건조한 겨울 공기를 자꾸만 들이마신 콧속이 머리 아프도록 시큰거리고 있었다. 후타쿠치는 부실 문을 밀어 열며 마르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충 인사를 던졌다.


너 그러고 왔냐?”


별로 반갑지도 않은 목소리가 이른 아침부터 그를 쪼아대는 것 같아서 후타쿠치는 대놓고 얼굴을 찡그렸다.


뭐가요?”

오늘부터 날씨 엄청 추워졌잖아. 안 춥냐고.”

. 카마사키 선배는 추워요? 그게 다 쓸데없이 근육만 많아서 그래요.”


투박하게 걱정하는 말에 시비 걸듯 대답하고 나서야 후타쿠치는 찬바람에 굳어 있던 얼굴이 좀 녹는 것을 느꼈다. 카마사키가 뭐라고 화를 내는 말도 귀에 잘 들려오지 않았다. 그냥 선배를 지나쳐 라커를 열고 운동복을 꺼냈다.


후타쿠치에게 카마사키가 반갑지 않은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 이미 OB가 된 주제에 왜 이 아침부터 부실에 와 있느냐. 둘째, 왜 나한테 날씨가 어쩌고 하면서 쓸데없이 잔소리지? 셋째, 날 차버린 주제에. 그는 잔뜩 빗나가고 싶은 마음으로 자켓과 셔츠를 벗어 옷걸이에 대충 걸었다. 이미 체육복 차림이었던 카마사키는 뒤쪽의 평상에 몸을 늘어뜨리고 앉아 그런 후타쿠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말이야, 혹시 그 일 때문에 그러냐?”


아까와는 다르게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후타쿠치는 괜히 그게 더 싫었다. 거절했으면 그냥 모른 척 좀 해주지 왜 눈치를 보냐고.


그거 장난이었거든요?”

?”

내가 선배를 진짜로 좋아할 리 없잖아요. 그걸 믿었어요?”

…….”

아 좀, 그냥 장난이었구나, 아니면 없었던 일이었구나, 해달라고요!”


후타쿠치는 거짓말인 척 꾸며내어 이 짜증나고 자존심 상하는 상황을 넘겨보려다 그만 아무렇게나 소리치고는 부실을 뛰쳐나와 버렸다. 그걸 믿었냐고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비웃음을 던지려다 마주쳐버린 카마사키의 눈이 거짓말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시선을 피하며 뱉은 말끝이 떨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없었던 일로 하지도 못하고, 자존심을 지키지도 못하고. 진짜로 좋아한다고 다시 말해버린 거나 다름없어졌다. 당장 생각나는 욕 몇 마디를 뱉으며 체육관으로 뛰어 들어와서야 겨우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는 후타쿠치의 얼굴이 그새 겨울바람에 빨갛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 마음이 착각이길 누구보다 바랐던 건 후타쿠치 자신이었다. 그냥 선배들이 은퇴한다니까 서운해서 좀 머리가 이상해졌던 거라고, 차라리 다른 사람이었으면 다른 사람이었지 카마사키 선배일 리가 없다고, 그렇게 몇 번이나 생각하려 했었다. 하지만 제 몸 속에 있는 마음이라는 걸 어째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걸까. 문득 소름이 돋고 온몸이 떨려왔다. 반팔 운동복만 입고 겨울바람을 맞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후타쿠치는 답을 알면서도 그냥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양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2.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제발, 부탁해. 너라면 다들 믿어 줄 거란 말야.”

곤란한데.”


은밀한 만남은 다테공업고등학교와 카라스노 고등학교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나는 것은 위험했다. 언제 가도 아는 얼굴을 마주치는, 남고생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으니까.


후타쿠치의 앞에 앉아 수제 햄버거 세트를 거의 다 먹어가는 엔노시타 치카라의 표정은 평소처럼 나른해 보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곤란함이 드러나 있었다. 엔노시타는 마지막 남은 감자튀김을 케찹에 찍어 입 속에 넣고는 메론소다를 쭉 빨아 마시며 슬쩍 웃었다.


이거, 괜히 먹었네.”

다 먹었으니까 해 줄 거지?”


턱을 괸 채로 자신의 앞으로 잔뜩 몸을 기울이고는 대답을 재촉하는 후타쿠치 때문에 엔노시타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긍정의 대답을 듣고는 살았다는 듯 웃는 후타쿠치의 얼굴을 엔노시타가 멍하니 바라본 것은,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주 잠시였다.


배구부원들이 잘 아는 사람은 절대 안 된다. 그 생각으로 후타쿠치가 눈에 불을 켜고 찾다 생각난 사람이 엔노시타였다. 올해 시합을 한 적이 없었으니 그의 흐릿한 얼굴이 부원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해도, 엔노시타는 분명 왠지 모르게 믿음직스러운 이미지의 카라스노 차기 주장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 믿음직스러운 분을 자주 마주친 곳이 고등학생들이 자주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으슥한 뒷골목이었다는 점은, 후타쿠치 혼자만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엔노시타를 설득하기까지는 사실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엔노시타는 처음 후타쿠치와 가게에 들어선 순간부터 감자튀김과 햄버거가 식어빠질 때까지 앞자리에 앉아 그의 구구절절한 사정을 들어야 했다. 내가 애인 있다고 거짓말 했는데, 진짜 들키면 나 쪽팔려서 죽을지도 몰라, 아니, 아니, 미안, 사실은 선배한테 고백했다 차였어, 아 내가 여기까진 말 안하려고 했는데, 너 내 비밀 들었으니까 애인인 척 해 주는 거다, 안 그럼 너 담배 피우는 거 너네 학교에 찌를 거야, 아니 미안해, 협박하는 거 진짜 아니야…… 그 말을 듣는 엔노시타의 표정은 일관되게 멍한 채였다.


근데 너, 너네 부원들한테 소문나면 어떡해?”


다짜고짜 엔노시타를 불러내서 반 강제로 승낙을 받기는 했지만, 후타쿠치는 승낙을 받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갑자기 의심스러워졌다. 자신과 사귀는 척 하는 게 정말 괜찮다고? 나중에 헤어졌다고 말한다고 해도 구남친 딱지가 붙는 건데 말이다.


나랑 사귀었다고 평생 동창회 할 때마다 놀림 받을 수도 있잖아.”


엔노시타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곧 냅킨으로 입을 닦고는 교복 위에 코트를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건, 역시 곤란하네.”

……! 너 취소 없는 거 알지?”


쓰레기만 남은 쟁반을 처리하고 밖으로 먼저 나서는 엔노시타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가며 후타쿠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엔노시타는 옆으로 따라붙어 자신의 팔을 잡아 흔드는 그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을 뿐이었다. 어쩐지 다정하게 올라간 입 꼬리는 목에 칭칭 감긴 목도리에 파묻혀 후타쿠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3.


후타쿠치는 교실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펜을 돌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운동장에도, 화단에도, 나무 위에도 어젯밤 내린 눈이 쌓여 있었고, 눈이 온 뒤 따뜻해진 햇살이 그 위로 내리쬐어 바깥세상은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모순적이네. 그는 생각했다. 저렇게 따뜻해 보여도 만지면 차가울 텐데, 겨울 바깥바람이 차단된 실내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마냥 포근해 보였으니 말이다.


좋아하는 마음의 시작이 언제부터였을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흘렀다. 사실은 뭘 해도, 뭘 봐도 그런 생각만 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티격태격 싸우는 게 재미있었다. 흥미를 느꼈으니 그럼 그게 처음이었나 보다. 선배가 장난으로, 때론 정말 약이 올라서 진심으로 화내나 싶다가도 선배랍시고 어른스러운 척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져 주는 게 당연한 일상으로 반복되었고, 그러면서 그에게 익숙해지고 정이 들었다. 연습이 끝난 뒤 다 같이 밥을 먹고, 때로는 단합회처럼 놀러 가곤 할 때마다 후타쿠치는 눈으로 선배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강스파이크를 가슴으로 받아낸 것처럼 충격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선배들의 은퇴시합, 굳게 닫힌 부실 문을 차마 밀어 열지 못하고 안에서 들려오는 분함과 아쉬움에 찬 울음을 들었던 그 날. 더 이상 같이 배구를 할 수 없다는 거, 같이 시합에 나갈 수 없다는 거. 몸을 부대끼고, 장난스러운 핀잔을 주고받고, 놀리고 놀림 받는 그런 것들을 함께할 수 없게 된다는 거. 무섭게 가슴팍으로 내리꽂히는 현실에 후타쿠치는 자신의 눈을 시큰거리게 만들었던 그 감정이 시합에 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삼학년들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부터는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다. 소수의 진학반을 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구직을 위한 면접이니, 교육이니 하는 것들을 이유로 수업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타쿠치는 괜히 사사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 뭐하세요.

-모니와랑 카마사키랑 면접 끝나고 밥 먹는 중! ?


후타쿠치는 더 이상 답장하지 않고 핸드폰을 책상 서랍에 밀어 넣어 버렸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힘들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정말 처음 겪는 감정이고 상황이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애초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던졌던 고백이었다. 그 이후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이렇게 쪽박 날 줄은 몰랐지, 생각하며 후타쿠치는 교과서를 볼펜으로 죽죽 그었다. 책의 인물 삽화에 아무렇게나 삐죽삐죽 짧은 머리카락을 그리고, 노란색 형광펜을 꺼내 색깔을 칠하니 노란빛이 금세 볼펜 잉크 때문에 시꺼멓게 번져 갔다.


구리네.


후타쿠치는 때맞춰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가방을 둘러멨다. 그를 찾아가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엉망으로 번져 버린 낙서보다, 더 구리고 유치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이제 신경 끄셔도 된다는 겁니다.”


제대로 눈을 마주치고 말하는 데 성공했다. 후타쿠치는 생각보다 더 삐뚤어진 말투로 말이 뱉어져 잠시 당황했지만 그걸 내색하지 않는 데에도 성공했다.


다른 삼학년들과 헤어져 혼자 집으로 가는 길에 후타쿠치를 맞닥뜨린 카마사키는, 그들의 마주침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들은 후배의 말에 잠시 그 뜻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네 말은, 이미 사귀는 사람이 생겼으니 없었던 일로 해 달라? 그거야?”

대충 비슷하네요.”

, .”

뭐예요, 그 반응은.”


후타쿠치가 뚱하게 물어도 카마사키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으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을 뿐이었다. 키가 훤칠한 두 남고생이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구도로 골목에 서 있는 동안 그들의 발밑으로는 눈이 녹고 있었다. 카마사키는 검게 변해 질척거리는 눈이 묻은 신발을 잠시 내려다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거 참 빠르다.”

……칭찬이에요?”

아니.”

 

짧게 부정만 해 놓고 카마사키는 후타쿠치를 지나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순식간에 멀뚱히 남겨진 후타쿠치는 당황해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카마사키의 등이 말 걸지 말라는 듯 너무나 단호해서 그만 멀어지는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4.


엔노시타와 후타쿠치는 약속대로 다테공업고등학교의 정문 앞에서 만났다. 학교를 마치고 온 엔노시타를 후타쿠치가 시간 맞춰 마중 나가기로 했었지만, 청소를 빼먹고 도망가려는 걸 붙잡혀 잔소리를 듣는 통에 오히려 후타쿠치가 더 늦어진 차였다.


엔노시타는 교복 위에 단정한 코트를 입고 하얀 머플러를 두른 채로 교문에 기대 서 있었다. 딱히 추워 보이지는 않는 표정이었지만 인사를 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하얀 입김이 사정없이 새어나왔다. 후타쿠치는 조금 미안한 마음에 엔노시타를 잡아끌었다.


후타쿠치.”


교문을 바쁘게 통과하던 카마사키가 둘을 보고 멈춰 선 것도 그때였다.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나타난 인물을 보고 후타쿠치는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신음을 냈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카마사키는 휘적휘적 걸어와 둘 앞에 섰다.


카라스노?”

이건, 아니 그러니까 얘는,”


엔노시타는 카마사키가 나타난 때부터 후타쿠치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해 말을 더듬는 후타쿠치를 보며, 반쯤 가려진 얼굴에 아무도 모르는 미소가 떠올랐다.


……시합 때 친해졌어요.”

……?”


대신 이어진 엔노시타의 대답에 바보 같은 소리를 입 밖으로 낸 건 카마사키가 아니라 후타쿠치였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카마사키가 보지 못하도록 등을 돌리고서 후타쿠치는 입을 벙긋거렸다.


이게 아니잖아!’


하지만 엔노시타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배구 얘기나 마저 하려고 잠깐 왔던 겁니다. 자주 얘기했거든요.”

, 그래.”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표정을 한 카마사키가 엔노시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후타쿠치에게 가볍게 한 마디를 던졌다.


삼학년들 체육관에 다 와 있으니까, 친구 보내면 들어와라.”

…….”


후타쿠치의 굳은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카마사키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조합이었지만 엔노시타의 태연한 얼굴은 한 치의 거짓말도 말한 적 없다는 듯 평온할 뿐이었으니 카마사키가 그의 말을 한 번에 납득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칼바람이 부는 교문 앞에 둘만 남겨지자 후타쿠치가 엔노시타에게로 고개를 확 틀었다.


뭐야! 사귄다고 했어야지! 마음 바뀐 거야?”

…….”


후타쿠치는 엔노시타의 빙글 웃기만 하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자신을 몰아붙이기라도 할 것처럼 다가온 후타쿠치의 얼굴을 흔들림 없이 마주하는 엔노시타의 표정은 바람 한 점 맞지 않는 것처럼 여전하기만 했다.


그래, 마음이 바뀌었어.”


꽤 한참 만에 느릿느릿 대답을 내놓은 엔노시타는 후타쿠치가 헛웃음을 뱉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목덜미를 확 끌어당겼다.


……!”


입술이 부벼진 순간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노시타가 어디에 이런 열정을 용케 감췄나 싶을 정도로, 겨울바람에 살짝 까슬해진 입술은 뜨거웠다.


역시 사귀어 보지도 못하고 구남친 소리나 듣는 건 곤란하잖아.”

…….”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후타쿠치보다 앞서 입을 연 것도 엔노시타였다. 후타쿠치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가 처음 보는 엔노시타의 얼굴이었다. 반쯤 딱딱하게 굳어있기도 하고, 또 얼마쯤 화난 듯한 눈빛에, 어쩐지 달아오른 얼굴. 그런데 그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평소처럼 적당히 낮은 목소리. 태연한 척 꾸며내는 목소리였네. 후타쿠치는 그 얼굴을 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미안.”


후타쿠치에게서 멍하니 흘러나온 말은 사과였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좀 얄미웠거든, 네가.”

, 미안…….”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당황해 가만히 서 있는 후타쿠치가 의외로 참 약지 못하구나 싶었다. 하긴, 그러니 제가 좋아하는 선배 앞에서 거짓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겠지. 아마 거짓말하기도 싫었을 것이고.


엔노시타는 후타쿠치가 꽤 좋았다. 아직 절절한 사랑이라고 부를 만큼의 감정은 아니었으니, 저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풋사랑 정도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애인 행세가 좋으면서도 싫었던 거다. 좋지, 너의 남자친구인데. 싫어, 너는 다른 사람 좋아하잖아.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마음이 엔노시타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관심 있는 애와 더 어울릴 수 있는 구실, 그러면서 내가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당연히 따라오는 생각들에 엔노시타는 잠시 유혹 당했다.


그렇지만 역시 자존심이 강하고 곧은 성격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후타쿠치의 눈이 아직은 자신에게 한 자락도 희망을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엔노시타를 조금씩 비참하게 했다. 날 그렇게 이용하지 마, 라고 따지기에는 둘 사이에 아무 것도 없었다. 털어놓은 감정도 없었고, 주고받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엔노시타는 적당한 때 물러나는 편을 택했다. 혼자만 아는 작은 마음임에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왕이면 예쁘게 간직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제대로 시작하지는 못했어도 그 나름대로의 소중하고 귀한 마음이었으니까 말이다.


, 후타쿠치.”


엔노시타는 구구절절한 설명은 맘속으로 삼키기로 했다. 여기서 더 말해줘서 괜히 저만 더 비참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카마사키 앞에서 내키지도 않는 연극을 하는 걸 자신이 막아 준 거라고, 그렇게 생색을 내 봤자 미안하다는 말을 또 듣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조용히 한 번 입술이나 맞대 보는 게 낫지.


네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가. 거짓말 하지 말고.”


검정 코트 주머니에 어느새 손을 넣은 채로 서서, 엔노시타는 후타쿠치를 향해 웃었다. 눈까지 휘어지는 웃음이었다. 목도리에 입술이 가려져 있어도 이번에는 알 수 있었다.


, 나 가 볼게, 그럼. ……고마워, 엔노시타.”


무언가 조금은 감을 잡은 얼굴로 후타쿠치는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엔노시타는 미안함이 가득 담긴 눈을 마주치다 먼저 시선을 돌렸다. 후타쿠치가 곧 등을 돌려 뛰어가더니 시야에서 멀어졌다.


좋아한다고 말 꺼내볼 만한 감정이었나?


엔노시타는 돌아서며 웃었다.

후타쿠치를 붙잡았던 손이 아까부터 떨리고 있었다.

 






5.


연습이 끝난 뒤 체육관이 부산스러운 틈에 카마사키가 후타쿠치 옆으로 다가왔다. 후타쿠치는 스포츠 드링크를 마시던 그대로 그를 옆눈질해 바라보았다.


아까 걔, 처음엔 네가 말한 그 사람인 줄 알았어.”

그게 누군데요. 그렇게 대명사를 많이 쓰니까 취직이 어려운 겁니다.”

……됐다. 너 나랑 얘기하는 거 싫지?”

……, 애인 없어요.”


? 하며 카마사키가 돌아본 곳에는 어느새 져지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서서는 그를 외면한 후타쿠치가 있었다.


쪽팔려서 거짓말 좀 했어요.”

그런거였냐.”

선배는 너무 태연해 보여서. 근데 난 지금은 그러기 힘들거든요? 내 마음 아직 변함없다고요.”


거기까지 말하고 후타쿠치는 그만 몸을 돌려 뛰었다. 젠장, 창피해.


아까 전 엔노시타와의 일로 이상하게 들뜬 듯 생겨났던 용기는 말을 끝내는 순간 다 사그라져 없어졌다. 따라오지 않으면 그냥 이대로 끝내 버리는 거고, 날 따라오면 사람들 없는 데서 덜 창피하게 차이는 거지 뭐. 두 번이나 근육바보 따위에게 차이다니. 후타쿠치는 순식간에 땀을 식히는 찬바람에 오한을 느끼며 부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불을 켜기 직전 자신을 따라 들어온 조금 더 큰 그림자가 제 그림자를 덮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달칵, 불이 켜짐과 동시에 문이 닫혔다.


너 감기 걸려.”

제가 알아서 할게요.”


, 후타쿠치의 등 뒤에서 카마사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따라 왔으면 할 말이나 빨리 하시지.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동정은 필요 없었다. 후타쿠치는 짜증 섞인 얼굴로 뒤돌아 카마사키를 마주했다.


, 내가 왜 쓸데없이 네 걱정 하는지 모르겠냐?”

그걸 내가 어떻게.”


후타쿠치의 말이 문득 끊어졌다. 카마사키는 다른 말없이 시선을 내리더니 후타쿠치의 손을 붙잡았다. 크고 투박한 손이 의외로 섬세하게 손가락 하나하나를 매만져 오는 통에 그만 후타쿠치의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크리스마스에 뭐 해?”

…….”

별 일 없으면나랑 보내자.”

…….”


마침내 카마사키의 얼굴이 붉어졌다. 후타쿠치는 그 얼굴을 보고서야 저 멀리 떠나갔던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그러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저번에 골목에서 나 기다리고 있었을 때, 그 때 얼굴 보자마자 말하고 싶었거든. 근데 애인 있다고 그래서, 망했구나 싶었지.”


후타쿠치는 지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서 있었고, 카마사키의 손은 여전히 후타쿠치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손가락이 맞닿은 부분에서부터 온기를 받아 녹아 간다.


원래 카마사키에게 후타쿠치는 그저 좀 뺀질거리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후배였다. 그것도 정이 좀 들고 나서 얘기지, 처음에는 실력은 좋은 애가 얄미운 말만 해 대는 게, 진짜 삐뚤어진 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후타쿠치가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은 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후타쿠치의 시비 거는 말투, 얄미운 행동들은 전부 카마사키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의 것들이었다.


그러다 그 마음이 후배를 생각하는 선배 이상이라는 걸 깨달은 건 언제였을까. 마지막 시합을 한 날, 예상할 새도 없이 이대로 끝나버렸다는 사실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났던 그 날이었다. 함께 은퇴할 삼학년들과 부실에 틀어박혀 눈물을 삼키며 카마사키는 후타쿠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 일상이 더는 없다니, 믿을 수 없이 싫었다.


하지만 카마사키는 자신 없었다. 그 자신감 넘치고 인기 많은 후배가, 저를 보게 만들 자신이. 갑작스럽게 고백을 받았을 땐 한 마디도 믿기 힘들어 멍청히 서 있기만 했었다. 그 상처 받은 얼굴을 보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었고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저 찼잖아요.”


부루퉁한 목소리에 카마사키는 남은 한 쪽 손으로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리고 취업 시즌이라 제정신이 아니었어. 뭣보다 난, 나는……, 내가 설마 네 눈에 찰 줄은 몰랐다. 진짜로.”

, 뭐요?”

그래도 얌마! 난 싫다고는 안 했어! 내가 망설이고 있는데 네가 혼자 뛰쳐나갔잖아!”

, 그럼 빨리빨리 말해야 될 거 아니에요! 내가 삽질을 얼마나 했는지 알아요?”


결국 후타쿠치는 빼액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그러고선 한 손을 들어 자꾸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손등으로 가려 버렸다.


미안해, 진짜.”

선배는 자기 자신한테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제 눈에 찰 줄 몰랐다고요? 맨날 근육자랑 한 사람은 그럼 누군데요.”

그건 진짜야. 나름대로 치고받고 하면서 너도 나랑 정은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 같은 생각일 줄은 몰랐어.”

?”


후타쿠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린 손을 스르르 떨어뜨렸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너도 날 좋아할 줄은 몰랐다고. 나도 너좋아한다고.”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후타쿠치와 마주친 카마사키의 눈에서는 분명한 진심이 보였다. . 후타쿠치는 짧은 한숨을 토했다.


저번에 부실에서 말하려고 했었어. 근데 타이밍이,”

선배솔직히 즐겼죠? 일부러 내 반응 보면서 실컷 놀려먹다가 이렇, 이렇게 될 때 쯤말하려고…….”


순식간에 진지해지는 분위기가 머쓱해 평소처럼 한 마디 해 보려던 후타쿠치의 시도는 그때까지 붙잡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제 얼굴로 가까이 가져가는 카마사키 때문에 도중에 실패했다. 카마사키는 웃음은 참지 못했지만 후타쿠치를 향한 시선은 흔들림 없이 진지한 그대로였다. 그리고 제 앞에 선 후배가 시선을 피하기도 전에, 빠르게 그 손등과 손바닥에 차례로 한 번씩 입 맞추고는 곧바로 팔을 끌어당겼다.


카마사키는 지난 이 년 동안의 눈물 나는 경험으로, 드디어 후타쿠치를 아무 말 못하게 만드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쌍방향의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안 되는,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