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시시라 [우백] 1월호
열정
우시지마 와카토시 X 시라부 켄지로
w.비누꽃
단 한 번도 선배의 앞에서 약한 소리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시련을 겪게 마련이고, 그에 흔들리기 마련이다. 이런 생각이 나의 오만함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어린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 역시 그런 약함을 이해한다. 다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용납할 수 없었을 뿐이다. 누구나 기대하고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대도 나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순간, 내가 다루는 그 남자, 나의 에이스는 나를 내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시지마 와카토시와 함께한 2년 동안 줄곧 그런 마음으로 긴장을 유지하고 나를 채찍질해 왔다. 중학교 때는 꼭 따라잡고 싶은 우상이었고, 고등학교에 와서는 코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나의 가장 강한 무기가 되었으며 내가 절대 책잡히고 싶지 않은 사람. 그게 우시지마 선배라는 사람이 내게 갖는 의미였다. 그리고 나는 그와 함께하는 고교 배구에 나의 모든 열정을 걸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
“휴식-!”
코치가 휘슬을 불었지만 나는 연습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늘 셋업은 어떻게 봐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나는 성질이 나 저만치 모여 서 있는 선배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욕을 뱉었다. 가까이 서 있던 고시키만이 흠칫한 눈빛을 보냈을 뿐이었다.
“켄지로, 너무 무리하지 마. 그리고 오늘 생일이잖아.”
벽에 대고 공을 튀기는 나에게 카와니시가 다가와 말렸다. 생일인 게 뭐. 내가 한 번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면 말릴 수 없다는 걸 부원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카와니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진 자리를 또다시 채운 사람은… 우시지마 선배였다.
“시라부, 너무 무리하지 마.”
이름 대신 성을 부르는 것만 빼면 카와니시와 똑같은 말이었다. 나는 그게 조금 우스워 아까보다는 풀어진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공을 주워들었다.
“오늘 부진해서 죄송합니다.”
선배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말리러 왔으면 너 오늘 괜찮았다고 말할 법도 한데 선배는 그런 요령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긴 우리 팀에 그런 식으로 누굴 달래려 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공을 저만치로 던져 버린 뒤에도 선배가 내 옆에 서 있어서 나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더 하실 말 있으세요?”
“이따 저녁 먹고 잠깐 나올 수 있나?”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네, 하고 대답했다. 조금 이상했지만 지금은 머릿속에 오늘의 연습 생각뿐이었다.
*
“제가… 받아도 됩니까?”
“네 생일이잖아. 생일 축하한다, 시라부.”
기대하지 못한 선물이었다. 내 생일인 건 맞았어도 이미 부원들이 돈을 모아서 준비한 선물을 받은 뒤였기 때문이었다. 우시지마 선배는 내게 깔끔하게 포장된 선물을 건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선배가 나를 기숙사 로비로 일부러 불러내서 선물을 주었다는 것보다 그 점이 더 충격이었다. 여자 친구 앞에서나 지을 법한 웃음을, 저 선배가. 그건 텐도 선배의 농담에 피식 웃는다거나 어려운 공격이 제대로 성공할 때 가끔 보이는 뿌듯한 웃음 같은 것들과는 다른 종류였다. 선배도 드디어 사회성이 발전하는 건가.
어쨌든 선배가 계속 내 앞에 서 있어서 나는 포장지를 찢어 선물을 꺼내 보았다. 처음에는 아마 새 무릎 보호대나 스포츠 브랜드 로고가 박힌 손목 밴드 같은 게 아닐까, 짐작했다. 그런데 받고 나서 생각해보니 박스는 작았지만 이상하게 무거웠다. 스프레이 파스나 방향제인가? 나는 무턱대고 그런 종류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
백화점 일 층을 통과해 지나갈 때마다 자주 보았던 화장품 로고가 찍힌 하얀색의 상자를 보며 나는 당황해서 멍청한 소리를 냈다. 한 번 선배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계속 열어보지 않고 뭐 하냐는듯한 얼굴로 목석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조심조심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열자마자 그 백화점 일 층의 냄새가 확 풍겼다. 작은 향수였다.
“선배… 어, 그러니까 이건 향수네요.”
“그래.”
“이런 비싼 걸… 왜 저한테…?”
나는 최대한 무례하지 않게 순수한 의문만을 표하려고 애쓰며 선배에게 물었다. 우시지마 선배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곧 입을 열었다.
“넌 좋은 세터니까.”
“예에?”
순수한 의문이고 뭐고 나는 그 얼토당토않은 답에 그만 크게 되묻고 말았다.
“뭘 선물하면 좋을지는 텐도에게 물어봤지만 향은 내가 직접 고른 거야.”
“…….”
“시라부 너한테 어울리는 냄새라서.”
내 궁금증은 풀어 주지도 않고 선배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진짜야? 진심이에요, 선배? 이런, 나는 돌덩이 같은 부담감이 내 마음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걸 받고 앞으로 대체 내가 얼마나 더 잘해야 하는 건데! 나는 기숙사 계단을 올라 사라지는 우시지마 선배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서 있어야 했다.
*
내 생일에 따로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선배의 생일에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침대에 드러누워 한참을 고민하던 내 눈에 책상 구석에 놓인 향수병이 들어왔다. 우시지마 선배가 준 선물은 남자 향수치고 향이 가볍고 상큼한 게 사실 마음에 쏙 들었고, 연습이 없는 주말이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자주 뿌리곤 했다. 나는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 속에 용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젠장…….
*
“생일 축하드립니다, 우시지마 선배.”
“그래, 고마워.”
“이건 디퓨저라고 하는 건데, 방에 두는 방향제래요.”
연습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가 스포츠백을 뒤적여 선물을 꺼내자 선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꼭 학교 식당에 하이라이스 정식이 나왔을 때처럼 바뀌었다. 아니, 그것보단 좀 더 기쁜 얼굴인가? 나는 처음 보는 표정이라 뭐라고 그 얼굴을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왜 놀라는 걸까. 세 달 전에 선물을 주셨으니 당연히 돌려 받으셔야죠, 선배. 우시지마 선배가 성인이 되어서 사기 같은 거 안당하고 잘 살아갈 수는 있는 걸까……. 순간 그런 걱정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건… 고마워, 시라부. 내 방에 둘게.”
그리고 선배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코트 위에서의 하이파이브가 아닌 이런 스킨십은 처음이었다. 나는 순간 심장이 뛰었다. 내 놀란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선배는 곧 몸을 돌려 먼저 기숙사로 들어가 버렸다.
*
첫눈이 내렸다.
나는 무심코 들고 있던 우산을 높이 기울여 선배의 머리 위로 씌웠다. 우시지마 선배는 한 걸음을 더 옮겨 내가 우산을 들기 편한 범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내 손에서 우산을 가져가 대신 들었다. 소복소복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느껴질 만큼 큰 함박눈이었다.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
“말씀하세요, 선배.”
날은 그리 춥지 않았다. 하지만 얇은 가죽장갑을 낀 나와는 달리 선배는 맨손으로 우산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그 손이 빨갛게 얼어붙는 게 보고 싶지 않았다. 강한 스파이크를 때리는 큰 손이고, 절대 약하지 않은데도. 어쩌면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 손이기 때문일까.
“날이 추운데 로비에서 말씀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선배.”
“아니…, 다른 애들이 보면 안 돼.”
최근의 선배는 확실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전에는 선배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든 아, 배구 생각 하는구나, 하고 넘기면 됐었는데. 선배는 드물게 말을 망설이는듯하다 곧 입을 열었다.
“은퇴식에서 못했던 말이 있어. 코트 밖에서 지시는 항상 내가 했었지만 너는 코트에서 나를 정말 훌륭하게 사용했다.”
“……감사합니다.”
“네가 나를 ‘나의 에이스’라고 생각하는 거 알아. 그리고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해서 다행이었어.”
“네?”
선배는 내가 의문을 보이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줄줄이 외워서 연습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어떤 식이든 너에게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준 거. 그게 다행이었고, 고마웠다. 처음에는 그냥…….”
“말씀하세요.”
“처음에는 그냥, 너의 열정적이고 무너지지 않는 모습이 항상 좋았어. 그러다가 이 마음이 처음과는 좀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됐다.”
“네….”
선배 앞에서 말끝을 흐린 적은 별로 없었다. 지시를 받을 때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던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선배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역시 선배는 남이 하면 낯간지럽게 들릴 말들을 무덤덤하게 해내는 재주가 기가 막히네, 하는 생각이 주였다. 나를 이만큼이나 좋게 평가하다니, 내 배구 생활 성공했다고 할 만하네.
나는 가만히 그 앞에 서 있었고, 내가 작년 크리스마스에 선물했던-배구부 선물 돌리기에서 걸린 것이다-머플러를 두른 우시지마 선배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너를 좋아해. 시라부.”
“네… 네?”
갑자기 팽팽 돌아가던 머릿속이 멈추었다.
“네가 좋은 세터라는 말은 진심이었지만, 그래서 선물을 주는 거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난 너를 후배 이상으로 좋아한다.”
선배가 생각보다 나를 더 좋게 생각하고 있고, 어쩌면 더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는 정말 예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대답해 달라는 말은 안 할게.”
내가 굳어서 서 있자 선배는 내게 우산을 다시 건네주려 했다. 아마 또 혼자 뒤돌아 걸어가 버리려는 것이겠지. 나는 붙잡지 못했다.
*
“…그러니까, 저희에게 기부하시면 어려운 아동을 도울 수 있어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시라토리자와 재단에서 길거리 모금도 합니까?”
“저희가 시라토리자와 재단 사람들이라니까요? 저기서 나오는 거 못 보셨어요?”
“……그렇군. 얼마를 드리면 됩니까?”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만큼만 주세요.”
크리스마스 휴가를 집에서 보내고 돌아와 교정을 가로질러 기숙사로 가는 길에 나는 사기꾼들에게 돈을 뜯기는 우시지마 선배를 발견했다. 그 날의 고백 이후로 단 둘이 밖에서 마주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선배를 줄곧 피해 다녔기 때문이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지금 단 둘은 아니었지만, 곧 단 둘이 될 것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필요 이상으로 거칠게 말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우시지마 선배의 앞을 가로막고 사기꾼들에게 문자로 옮기고 싶지 않은 말 몇 마디를 뱉어 주자 그들은 살짝 울먹이기까지 하며 돌아서 도망쳐 버렸다. 나는 내 뒤에 우뚝 선 우시지마 선배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는 데 오 분을 더 소비해야 했다.
“이해했다. 바보 같은 모습을 보였어.”
“다행입니다, 선배.”
나는 먼저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우시지마 선배는 나를 가볍게 붙잡았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나였으면 이미 거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고백을 받은 후로 선배에 대해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기는 했다. 선배는 연습을 봐 주러 왔을 때는 철저하게 나를 한 사람의 팀원으로만 대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오히려 내가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시지마 선배가 예전에도, 지금도 내 이상형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없었다. 그는 내가 동경하는 강한 선수였고, 이용하고 싶은 선수였다. 그리고 나를 강해지고 싶게 하고, 열정을 불태우도록 만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코트 밖에서도 선배에게 가슴이 뛰었을까? 문득 나는 어느 눈 오던 날이 생각났다. 하지만 아직 확신은 없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시간이….”
“…….”
“있을지 모르겠네.”
그 말을 하며 선배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곧 졸업이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 여지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도 선배의 목에 감긴 머플러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바보 같아.
*
내가 거절했다고 생각할 줄 알았다.
하지만 선배는 겨울방학 동안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나를 매번 기다렸다.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더니 내게 시간을 내기로 작정한 것처럼. 한가한가? 생각했지만 아마 내가 배구를 하고 공부도 하는 동안 대학부에 미리 가서 훨씬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을 것이었다. 피곤할 텐데. 그럼에도 선배는 내가 하얀 입김을 뿜으며 도서관 밖으로 나서면 어김없이 나타나 기숙사로 향하는 길을 함께 걸었다. 선배의 주머니에서는 손난로가 나오기도 했고, 온기가 가시지 않은 캔커피가 나오기도 했다. 마음을 비우고 그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하자 곧 나는 선배의 앞에서 어색함 없이 웃게 되었다. 이런 정성이 의외였고, 그러면서도 요령 있는 말 한 마디를 못 건네는 게 선배다워 자꾸만 웃었다. 방학이 끝나갈 때쯤부터는 선배를 만나는 날에 나는 항상 선물 받은 향수를 뿌렸다.
*
주문한 꽃을 찾는 게 예상보다 오래 걸려서 나는 헉헉거리며 교정까지 뛰어야 했다. 새잎이 돋은 오래된 나무 밑에 서 있던 우시지마 선배가 내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나는 손에 움켜쥐고 온 꽃다발을 간신히 선배에게 건넬 수 있었다. 그리고 선배가 꽃을 이리저리 구경하는 동안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아무리 나라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긴 했으니까.
나는 몸을 일으키고 선배에게 한 발짝 다가가 다짜고짜 요구했다.
“단추… 받을 수 있을까요.”
선배가 이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
그러나 우시지마 선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단추를 건넸다.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 큰 손으로 교복 재킷에 달린 단추를 비틀어 뜯는 데는 정말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요령 없는 손길에 교복 박음질 부분이 보기 싫게 울어 버려서,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좋아합니다, 우시지마 선배.”
“응. 고마워, 시라부.”
그리고 선배는 나를 가볍게 끌어당겨 안았다.
나를 강한 배구에 깊이 빠지게 만든 강한 사람, 나의 에이스. 나는 이 사람에게 새로운 열정을 쏟기로 했다.
열정,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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