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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HQ!!

[쿠로야쿠] 한여름 청춘

 

 

 

 

 

한여름 청춘

쿠로오 테츠로 X 야쿠 모리스케

 

 

w. 비누꽃

 

 

 

 


한여름의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유일하게 그늘졌던 수돗가.


나는 오랫동안 그 애의 뒤로 비친 그 햇살과 물 흐르는 얼굴에 진 그림자를 탓했다.


그 애를 좋아하게 된 게 아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서.

 

 

 

 

 

 

 

 

"뭘 봐?"


"어?"


"씻을 거면 씻던가. 금방 종 치는데."

 


우린 일학년이었고 그애는, 야쿠 모리스케는 아직 나에게 별로 살갑게 굴지 않았다. 나 역시 아직 그와 별것도 아닌 일로 말싸움을 하는 일이 잦았다. 같은 반에 앞뒤로 나란히 앉은 자리, 그런데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도 맞지 않는 성격이라니. 그러니 그 때의 우리는 매일 이래저래 입씨름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인 줄 아는 애들이었다.

 


"야, 쿠로오."

 


나를 부르는 야쿠의 얼굴 위로 도르륵 떨어지던 그 물방울들을 기억한다. 그 장면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 있다. 아마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체육 수업이 끝난 뒤 야쿠는 항상 수돗가에 제일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수도꼭지를 제일 끝까지 돌려 놓고, 그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로 동그란 머리통을 들이밀곤 했다. 키는 우리 반에서 제일 작으면서, 행동은 제일 사내애처럼 굴었다. 처음엔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야쿠는 축구도 잘 하고 달리기도 엄청 빨랐다. 운동도 잘 하고 성격도 털털하니 곧 우리 반은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다 야쿠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그 애의 그런 모습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그 때는 그게 뭐 어쩌라는 감정인지 대체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좋은 모습은 나 혼자만 알고 싶었던 거지.

 


"나 먼저 들어간다?"

 


야쿠는 나를 쳐다보던 그대로 체육복 상의를 쭉 잡아당겨 아무렇게나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그렇게 닦아도 또 머리에서 물 흐르는데. 나는 조금 의아한 듯 나를 힐끔거리며 지나치려던 야쿠의 팔을 나도 모르게 붙들었다.

 


"......야, 잠깐만."


"어?"

 

 


나는 내가 뭘 하는지 의식하지도 못하는 채로 목에 걸려 있던 수건을 잡아내렸다. 누구랑 수건 같이 쓰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그냥 나는 그 뜨겁던 햇빛을 등지고 걸어서 보이다 말다 하는 야쿠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손에 들린 보송보송한 수건이 야쿠의 머리에 얹히자 금세 축축해졌다. 야쿠가 놀란 소리를 내면서도 곧 가만히 서 있었던 건 내 얼굴이 아마 전에 없이 진지해서였을 거다. 나는 양 손으로 꼼꼼히 야쿠의 머리를 닦는 척 하면서 어쩐지 얌전히 내리깔린 눈을 한 야쿠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곧 내 시선을 느낀 야쿠의 눈이 나를 향해 치켜떠졌다. 거리가 가까워 어쩔 수 없이 나를 한껏 올려다보게 된 야쿠는 처음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내려다보지 마."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내가 떨떠름하게-웃으면 한 대 맞을 것 같았다-대꾸하며 수건을 거두자 야쿠는 수돗가로 휙, 뛰어올라 앉았다. 아, 그제서야 눈높이가 대충 맞았다. 야쿠는 양 다리를 달랑이며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이제 만족해?"


"조용히 해. 쪽팔리니까."

 


야쿠는 내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날은 너무 더웠고, 수돗물 냄새가 났다. 나무 그림자가 우리의 발치까지 따라와 있었다. 야쿠도 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더운 공기가 판단력을 흐려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곧 어떤 행동을 하고 싶어졌다.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려고 그랬노라고,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먼저 이상하게 굴었잖아, 하고 잡아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다가서자 야쿠의 얼굴 위로 더 짙은 그림자가 졌다. 그 애는 그걸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너..."

 


야쿠는 거기서 한 마디도 더 하지 못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야쿠의 손가락이 단단한 돌로 된 수돗가 위에 얹힌 채로 잔뜩 구부러졌다. 더워서, 우리 둘의 얼굴이 달아오른 건 분명 더워서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더듬더듬 야쿠의 그 손가락을 찾아 감싸 잡았다. 손가락이 얽혀들수록 나는 내 앞에 걸터앉은 야쿠에게로 더, 더 가까이 다가섰다.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꼭 꿈결같았다. 야쿠도, 나도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입술이 떨어져도 거리는 그대로였다. 우리는 순식간에 서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뜨거운 숨을 쉬었다. 어느샌가 완전히 깍지를 끼고 있던 손가락이 천천히 풀어졌다. 야쿠는 살짝 몸을 비킨 나를 지나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눈길을 거두면 이게 한순간의 일로 다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야, 쿠로오."


"어?"

 


잠시 바닥을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야쿠는 곧 고개를 쳐들고 나를 불렀다.

 


"너 자리 바꿔."

 


나는 그 후로 무슨 일만 있으면 이 때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 짧은 순간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면서도 혹시나 야쿠가 꼴보기 싫으니 가방 싸서 교실 저 쪽으로 꺼져 버리라고 할까봐 어찌나 걱정이 되었는지.

 


"내 자리를 왜?"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내리깔고 물었다. 하지만 야쿠는 픽, 웃더니 나를 지나쳐 먼저 걸어갔다.

 


"내 옆으로 바꾸라고."

 


내 심장을 발밑까지 떨어지게 한 그 한 마디만 남겨놓고.


곧 나는 웃으며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햇볕 속으로 나간 야쿠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서야 그 애의 귀가 빨개진 걸 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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