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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HQ!!

[엔노스가] 전야제


스가른 전력 60분, 주제 '전야제'

다이스가 요소 포함





전야제

엔노시타 치카라 X 스가와라 코우시



w.비누꽃





"여...장... 여...장..."


스가와라의 손끝이 칠판 위를 허무하게 덧그리고 있었다. 빈 교실로 도망쳐 온 스가와라는 노을의 마지막 자락이 겨우 들어오는 교실의 어둠 속에서 간절히 빌었다. 제발 날 찾지 말아줘. 찾지 말아줘.


카라스노 축제에서 배구부는 메이드&집사 카페를 하기로 정했다. 부원 다수가 흔하다고 질색했지만 흔한 것만큼 안전빵인 것도 없다며. 제비를 뽑아 정해진 메이드는 1학년과 3학년이었다. 타나카와 엔노시타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의상을 빌려 왔다. 니시노야는 자신에게 맞는 여성용 정장을 입느니 사나이답게 벗고 나가겠다고 선언했고, 아즈마네는 시험 삼아 제일 큰 사이즈의 메이드복을 입어 보다 옷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둘이 예외적으로 역할을 서로 바꾸기로 결정하는 동안 스가와라는 체육관에서 도망쳤다.


원래 같았으면 성격상 3학년 중에서 제일 먼저 나서서 메이드복을 입고 당당하게 돌아다닐 사람은 스가와라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왜냐면 엔노시타가...



"스가 선배, 찾았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드는 스가와라를 건져올린 건 드르륵 열리는 교실문의 소음과 익숙한 목소리였다. 다정한 중간톤의 목소리. 스가와라는 엔노시타를 마주하며 어제 귀에 속삭이던 그의 말을 떠올렸다.


'스가와라 선배, 이거 입고 저랑 해요.'


엔노시타가 다정하게 내뱉는 말들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엔노시타..."

"이거 입기 싫어서 도망친 거예요? 와, 어렵게 빌려 왔는데."


그는 웃으며 손에 들린 쇼핑백에서 치렁치렁한 옷을 꺼내들었다.


"그런거 아니야. 돌아가자."


엔노시타는 비켜 주지 않았다. 문을 다시 닫아버리고 그는 되려 스가와라를 은근히 밀며 밖에서 보이지 않는 교실의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가봤자 아무도 없어요. 다들 이미 전야제 때문에 나갔거든요."

"그럼 금방 부활동내용 발표해야 되는데. 부주장이 없으면... 엔노시타, 미안한데 아무래도,"

"이름으로 불러요, 선배."

"치카라,"


네, 하고 대답하며 그는 옷을 완전히 펼쳐들고 스가와라에게 이리저리 대 보았다. 


"다이치 선배한테는 제가 말하고 나왔어요. 스가와라 선배 찾아보겠다고. 다이치 선배가 실망할까봐 걱정돼요?"


엔노시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저는 선배가 이 옷 입어봤으면 좋겠어요. 지금. 저랑 단 둘이 있을 때."


스가와라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사와무라를 남다르게 생각하는 마음을 엔노시타에게 들켰다. 너무 갑자기 정곡을 찔려서 제때에 부정하지도 못했다. 엔노시타는 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고 그 후 스가와라는 예전과는 너무 다르게 변한 엔노시타를 상대하느라 진이 빠져 있었다. 그는 말 한 마디로 스가와라와 사와무라의 사이를 산산조각 낼 수 있었다.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스가와라는 천천히 교복 셔츠 단추를 풀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 빛은 남아 있었지만 스가와라는 불을 환하게 켜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잠시 서서 지켜보던 엔노시타는 가볍게 스가와라의 손을 밀어냈다.


"제가 해드릴게요. 너무 긴장한 거 아니에요?"


스가와라의 양 팔에서 빠져나온 셔츠는 가볍게 책상 위에 놓였다. 엔노시타는 메이드복의 복잡한 치맛속을 헤치고 목 부분을 찾아내 스가와라의 머리에서부터 씌워 입혔다. 헝크러진 머리를 엔노시타의 손이 잠시 북북 쓸었다. 스가와라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조금만 참자고.


"와, 사이즈 딱 맞네요. 다행이다."


웃는 낯과 마주하지 못하고 억지로 고개만 끄덕이자 엔노시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스가 선배, 축제가 싫으신가 봐요. 그럼 우리 집은 어때요?"

"아니야, 치카라."

"너무 굳어있지 마세요. 다이치 선배한테 말 안 할 테니까."


엔노시타는 손으로 스가와라를 가볍게 밀어 뒤돌렸다. 옷의 등 부분에 한 줄로 늘어선 단추를 잠그는 손길은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맨 등을 스칠 때마다 스가와라는 놀라서 움찔거렸다. 등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가 절 좋아했으면 좋았을 텐데."

"......"


엔노시타는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스가와라를 안아 왔다. 스가와라는 그만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깨를 안았던 팔이 빠르게 내려가 치마를 들추고 바지의 벨트를 풀어냈다.


"놀랐잖아요, 선배."


스가와라가 했어야 할 말을 대신 하며 엔노시타는 웃었다.


"그럼 바지는 그냥 입고 있으려고 했어요? 도와주는 건데 왜......"

"그만 해!"


스가와라는 몸을 틀어 엔노시타를 뿌리쳐 버리려고 했다. 엔노시타는 스가와라가 앉은 책상을 쾅, 발로 차 벽까지 밀었다. 벽과 엔노시타 사이에 갇힌 채였지만 스가와라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너 왜 이렇게까지 날 협박해? 미쳤어? 다 말해 버려, 난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야!"

"선배는 진짜 다이치 선배 좋아하나 봐요. 제가 다 말해버릴까봐 걱정하면서도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기도 하죠?"

"그딴 거 아니야. 처음엔 걱정돼서 너 하는대로 참고 있었는데, 진짜 실망이다 너. 비켜."


엔노시타는 비켜주지 않았다. 


"봄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진짜로 제가 주장이 걱정할 얘기 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스가와라가 말문이 막힐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마저 입고 저랑 전야제 보러 나가요. 빨리 가면 발표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

"여기서 우리끼리 전야제 하고 싶으세요?"

"아니야."


스가와라는 엔노시타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치마 위에 얹힌 엔노시타의 손은 곧 그 안으로 파고들어가 손쉽게 교복 바지를 끌어내렸다. 바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작을 같이해 엔노시타는 교실 바닥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는 선배의 눈빛이 기분 좋았다.


"예쁘네요, 스가와라 선배."


그리고 맨 다리 사이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엔노시타가 치마 밑으로 드러난 허벅지 안쪽에 여러 번 짧게 키스하는 동안 스가와라는 눈을 꾹 감고 있었다. 너무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주름이 잔뜩 잡힌 풍성한 치마 속에서 웃고 있는 얼굴이 빠져나오자 마자 교실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스가와라는 허리를 낚아챈 엔노시타의 손에 의해 바닥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스가, 교실에 있었어? 아, 엔노시타."


한쪽 손에 종이 뭉치를 쥔 사와무라가 급하게 교실로 들어섰다. 스가와라는 너무 놀라 잠시 말을 못 잇고 서 있었다. 엔노시타가 아무렇지 않게 스가와라의 교복을 챙기며 웃었다.


"지금 막 가려고 했어요."

"아, 옷 다 입었네, 풉..."

"웃, 웃지 마, 다이치."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스가와라는 태연히 사와무라에게로 걸어갔다.


"네가 입고 발표하는 것보단 낫잖아. 난 옆에 그냥 서 있을게."

"그래, 가자."


막 교실을 빠져나가려는 그들을 등 뒤에서 엔노시타가 불러 잡았다.


"스가와라 선배."


스가와라는 사와무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왜? 치카라."


필사적으로 웃는 스가와라의 얼굴을 보며 엔노시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선배, 후야제에도 그 옷 입고 저랑 나갈래요?"

"......그래."


스가와라는 그 말만 남기고 황급히 사와무라의 뒤를 따라 나갔다.




"스가,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 가게?"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내기해서 졌어."

"아아..."


스가와라는 사와무라 모르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직도 다리 안쪽이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