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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HQ!!

[쿠로야쿠] 고양이와 고양이 (중)

** BGM : Can't sleep love - Pentatonix








고양이와 고양이

쿠로오 테츠로 X 야쿠 모리스케




w.비누꽃









-2학년, 봄-


새해 첫 연습이 있던 날 야쿠는 내게 새 장갑 한 켤레를 내밀었다. 그 날 주워들고 간 내 장갑은 돌려주지 않았지만 그냥 우리는 말없이 그렇게 퉁쳤다. 그러다 보니 날이 점점 따뜻해졌다.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기를 기다리는 방학이었다. 그 즈음 야쿠와 나는 으르렁거리며 물어뜯는 횟수가 줄었다. 나는 덜 빈정거렸고, 야쿠는 덜 때렸다. 이유는 몰랐지만 카이는 우리가 철들어간다며 웃곤 했다. 나는 가끔씩, 아니 자주, 사실은 그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작년 겨울이 생각났다. 하지만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해서 단 한번도 얘기하지 않았다. 


"다음주에 카이한테 케이크 사주자."

"그럴까? 할머니댁 가서?"

"응."


개학하면 곧 카이의 생일이었다. 방학 마지막 주에 시골에 있는 카이네 할머니 댁으로 놀러가기로 한 우리는 들떠서 계획을 세웠다.


"선물은 뭐 해주지..."

"돈은 있냐?"


아니. 야쿠는 웅얼대며 햄버거를 마저 삼켰다. 카이는 데이트를 하러 갔고 둘만 남은 우리는 잠시 허탈하게 앉아있었다. 


"좋은건 여자친구가 사주겠지..."


이미 다 먹은 나는 할일없이 야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일 년 전보다 자란 것 같은데, 짧은 머리랑 먹을때 햄스터처럼 빵빵해지는 볼은 그대로였다. 입이 작은가...? 무심코 손가락을 뻗어 얼굴을 쿡 찔렀다.


"...?"

"......미안. 햄스터 같아서."


나는 주먹이 날아오길 기다렸지만 야쿠는 입 안에 든 것만 열심히 씹으며 휴지로 손을 뻗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리깐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져 있었다. 문득 저번에도 이렇게 얼굴을 붉혔던 때가 생각났다. 난... 난 내 얼굴이 더 빨개지기 전에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너, 너 먹는 거 기다리다가 해 지겠네!"

"뭐? 야, 내가 햄스터 새끼라 그렇다! 먼저 가든가!"

"햄스터는 엄청 귀엽거든요? 지금 갈거거든?"

"네가 햄스터 같다며?"

"내가 언제!"


야쿠는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인간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난 내가 얼마나 유치하게 굴었는지 깨달았다. 물론 쟤도 똑같지만... 아, 정말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건 정말로 야쿠 잘못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왜 잘 나가다가 한번씩 얼굴을 붉히는데? 정말이지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간지러운 느낌이 싫어서 더 한심하게 말이 나가는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상황을 모면하려고. 어른스러워지려면 정말 한참 멀었다. 야쿠를 두고 나와 길을 걸으면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와, 곧 꽃 피겠다."


전날 생일 케이크를 받고 계속 기분이 좋던 카이는 자전거를 타고 우리보다 먼저 계곡에서 나갔다. 장을 보고 돌아오시는 할머니를 마중하려고. 야쿠와 나는 물에서 나가기가 아쉬워 조금만 더 놀고 가기로 했다. 머리 위에 늘어진 가지들에 조금씩 꽃망울이 맺히고 있었다. 아직 물은 엄청나게 차가웠지만 우리는 신이 나서 수영을 하고 놀았다. 야쿠가 내 머리를 물에 처박았을 때 잠시 그를 물귀신으로 만들어 버릴까 생각했지만 내가 붙잡아 당긴 손목이 너무 한손에 잡혀서, 물에 젖어 미끄러지는 몸이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져서 그냥 봐주었다.


"나 발 씻을래."


나보다 먼저 바위에 올라가 옷을 입은 야쿠는 흙 묻은 발이 찝찝한지 슬리퍼를 신은 채로 물로 다시 들어왔다. 나는 그를 지나쳐 올라가서 티셔츠를 주워 입었다. 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외마디 비명이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발을 헛디딘 야쿠가 어이쿠,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나뒹굴었다. 머리 꼭지까지 물에 젖은 채로 일어나는 그의 얼떨떨한 얼굴에 민망해하는 웃음이 떠올랐다.


"아, 내 슬리퍼...!"


야쿠의 슬리퍼는 거센 물줄기를 따라 저 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바위에 앉아 배가 아프도록 박수를 치며 웃었다. 야쿠는 허탈해하며 웃는 것과 나를 노려보는 걸 동시에 하려고 애를 썼다.  물을 줄줄 흘리며 바위로 기어올라오는 야쿠의 손을 잡아 끌어당겨 주었다. 그리고 조금 천천히 놓았다. 야쿠도 나도 오늘 하루동안 묘하게 몸을 맞부딪혔고, 그리고 솔직히 둘 다 그걸 의식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집까지 맨발로 가게 생겼네."


야쿠가 티셔츠를 짜내자 물이 주르르륵 흘렀다. 아까 잡았던 손이 차가우면서도 뜨거웠던 게, 아직 내 손에 남아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다시 야쿠를 만질 기회를 잡았다. 물론 괜한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야, 그냥 업혀."

"그냥 흙바닥인데 뭐 어때."


그러고는 일어나서 땅을 디디려고 했다. 나는 야쿠가 고집을 부리는게 좀 짜증나서, 앞서 가려는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뭐라 하기 전에 그냥 그대로 등에 메듯이 들쳐업었다.


"야...!"

"장난하냐? 혹시라도 발 다치면 어쩌려고?"

"......"

"개학하면 바로 인터하이 연습이잖아. 별것도 아닌데 고집부리지 마."


미안, 하는 말이 내 목 뒤로 와닿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괜히 끙차, 하며 자세를 고쳤다. 축축하게 젖은 야쿠의 옷이 내 등에 철썩 달라붙었다. 그의 두 손이 내 어깨에 올라와 있었다. 힐끔 봐도 작은 손이었다. 그 손이 꿈지럭대다가 내 등을 밀었다.


"잠깐만 내려 줘."

"왜?"

"너까지 젖잖아. 옷 축축해서 찝찝해... 벗을래."


귀 옆에서 들리는 벗을래, 한 마디에 그만 얼굴이 폭발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너무 이상한 놈 같았다. 이렇게 물러터진 토마토 같은 얼굴을 야쿠에게 절대 보여줄 수 없어서, 야, 야 부르는 걸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계곡을 빠져나오면 보이는 정자까지 와서야 야쿠를 던지듯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엉덩이 깨지겠다..."


중얼대는 야쿠 옆에 무심코 주저앉았다가 티셔츠를 벗는 걸 보고 고개를 홱 돌렸다. 내 손 끝이 초조하게 정자 바닥을 두드렸다. 바람이 쌩 불었다. 더운 지방이긴 해도 확실히 아직은 날이 쌀쌀했다. 다시 돌아본 야쿠는 티셔츠의 물기를 짜내고 있었다. 우린 왜 반바지에 수건 한 장만 들고 나온걸까? 게다가 야쿠는 겉옷도 없이 달랑 티셔츠만 입고 있었다.


"이거 입어."


축축한 반바지를 수건으로 닦는 그에게 내 져지를 벗어서 건네주었다. 둘 다 감기 걸리기 전에 빨리 집에 가야할 것 같았다. 야쿠는 추운지 말없이 옷을 받아들어 걸쳤다. 그가 맨 몸에 내 옷을 입고, 지퍼를 올리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입술이 메말랐다. 옷은 야쿠에게 소매도 길었고 품도 헐렁헐렁하게 컸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작아 보였다.


"춥냐?"


야쿠가 또 이상한 내외를 시작했다. 춥다고 펄쩍펄쩍 뛰며 빨리 집에 가자고 하면 될 걸, 괜히 풀이 죽어서 날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어느새 얼굴은 하얘지고,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수영을 너무 오래 한 사람처럼. 야쿠는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빨리 다시 업고 집까지 뛰어가야지, 생각하면서도 나는 야쿠에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쿠로오...!"


내 이름을 부르는 야쿠의 목소리가 내 품에 묻혔다. 어느새 난 달달 떠는 야쿠를 끌어안고 있었다. 우리 반 여자애들 만한 그의 몸이 내 안에 쏙 들어왔다. 야쿠의 허리를 더 끌어당겨 안아주자 잠시 뒤 떨림이 천천히 멎었다. 그는 이상하게 말이 없었지만 난 사실 이 틈을 타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 날 나한테 뽀뽀했는지...


"너 왜..."


몸을 살짝 떼고 야쿠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야쿠가 양 팔을 내 등에 조심히 둘러왔다. 내 말은 거기서 멈춰 버렸다. 야쿠도 놀랐는지 고개를 든 채로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가까이 마주한 얼굴, 내 품에 꽉 안긴 야쿠. 얄미운 눈이 또 내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난 물어보는 대신 똑같이 갚아주기로 했다. 아니, 사실은 생각하기 전에 이미 하고 있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우리 둘 다 몸을 움찔했다. 긴장해서 목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야쿠는 처음에 당황해서 피하려는 듯 날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면서 입술이 비벼져서, 그게 또 신호탄이 됐다. 입술을 열고 고개를 비스듬히 꺾자 야쿠가 헉, 하는 소리를 냈다. 그대로 내 혀가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저번하고는 다르게 이번엔 입술이 말랑말랑했다. 혓바닥도. 자세를 고치며 야쿠를 더 끌어당겼다. 자꾸만 허리를 뒤로 빼는 게 싫었다. 내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야쿠가 끙끙거렸다. 이상한데, 기분이 너무 이상한데 너무 좋았다. 키스가 좋은건지, 야쿠가 좋은건지. 야쿠가 좋으니까 키스가 좋은 거 아닌가? 모르겠다. 한 손으로 야쿠의 뒷머리를 헤집어 당기며 더 깊이 입술을 붙였다.

 

"으, 흐..."


턱 끝도, 아래도 너무 찌릿찌릿했다. 나도 모르게 남은 한 손이 야쿠가 입은 내 옷 속으로 들어갔다. 맨 허리를 끌어안자 야쿠가 몸을 떨었다.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데 순간 여기가 밖인 게 떠올랐다.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숨이 터지며 우리는 동시에 입술을 떼고 떨어졌다.


"아."

"......"

"맞네. 궁금했는데. 너 입 작다."


나는 웃었는데. 


"마, 말도 안 돼."


야쿠는 입술을 턱 가리며 말했다. 얼굴에 눈물도 그렁그렁했다. 나는 좀 울컥했다. 말이 된다고 말하려고 했었다. 이것조차도 난 얘랑 안 맞는 건가. 순간 나는 그냥 그대로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응 진짜 말 안 되네, 하고 돌아서 가버릴까 했다. 분명히, 작년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정말로 나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몸을 돌려 뛰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바닥을 향한 내 시선에 야쿠의 맨발이 걸렸다. 신발도 없는 애를 두고 도망갈 수가 없었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일단은 감기 걸리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했다. 나는 야쿠 앞에 쭈그리고 앉아 등을 내밀었다. 돌아가는 내내 아무도 말이 없었다. 말을 꺼내고 싶었는데... 도망가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또 어물쩡 넘겨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기 싫었다. 야쿠와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왜 이러는지... 이게 뭔지. 호기심인지, 좋아하는 건지. 야쿠의 마음은 어떤지.


하지만 그날 밤 야쿠는 열이 나며 앓아누웠고, 다 나아서 도쿄로 돌아온 뒤로는 정신 없이 연습에만 몰두했다. 마침내 내가 말을 꺼내는 것을 포기하자 다시 나와 어울려 주었다. 그래도 절대 나와 단 둘이 있지는 않았다. 카이가 없으면 우리는 어색했다. 아무리 야쿠가 그래도 정자에서의 일은 절대 잊혀지지 않았다. 1학년이 입학하고, 켄마와 다시 호흡을 맞추게 되면서 나는 인터하이 외의 일은 일단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 노력했다. 천천히 생각해보고 싶었다.  







-2학년, 여름-


어릴 적부터 켄마와 배구를 함께했던 나는 내심 그가 네코마 배구부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만둘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낯선 곳을 껄끄러워 하는 켄마를 나보다 더 잘 지탱해준 건 야쿠였다. 팀 연습을 하고, 내가 모자란 내 연습에 더 매달리는 동안 야쿠는 켄마를 친동생처럼 챙겼다. 켄마도 야쿠에게 허물 없이 대했다. 그 점이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야쿠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그는 네 친한 친구라며, 그리고 켄마는 좋은 애야, 하고 중얼거리고는 요즘 늘 그러는 것처럼 내 옆을 쌩 지나쳐 도망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인근 학교와의 연습시합을 깔끔하게 스트레이트로 이겼다. 수비의 연계가 기막히게 들어맞은 결과였다. 그때부터 나는 야쿠라는 리베로가 내 등 뒤에 없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정말로 네코마 수비의 에이스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인정해야 했다. 우리 팀 누구보다 작고, 내가 매일같이 놀려대던 그가 누구보다 단단한 정신력으로 든든하게 우리의 등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문득 얼룩덜룩 물들어 있던 어느 날의 야쿠의 팔이 생각났다.

나도 지지 않을거다.




인터하이 예선에서 떨어진 후로 연습에만 몰두했다. 켄마는 코트 구석에서 게임을 하며 나를 기다렸다. 가끔씩 흘끔 바라보는 시선은 나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내 공을 계속 받아내던 야쿠도 지쳐 주저앉았다. 마음이 초조해서 속공도 블로킹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야쿠가 내 공을 거의 다 받아내는 게 너무 괴로웠다. 쟤는 왜 저렇게 잘하지. 내가 좀 더 연결을 잘 했더라면 마지막 시합에서 지지 않았을 텐데. 내가, 내가...... 책임감과 부담감이 나를 잡아먹는 걸 느꼈다.




"...괜찮냐?"


야쿠가 시합 외에 내게 말을 거는 게 얼마만일까.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늘어지는 몸을 끌고 문을 열자 야쿠와 카이가 서 있었다. 켄마도 이미 왔다 갔을 정도니, 내가 요즘 애들한테 얼마나 걱정을 끼치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문자로 여러 번 괜찮다고 했는데도 애들은 병문안을 왔다. 열은 거의 내렸고 기운만 좀 없는 상태여서 나는 웃어보였다. 아마 켄마와 같은 말을 하고 싶어서 왔을 것이다.


"넌 잘하고 있어. 2학년 중에서도 네가 제일 잘하고, 선배들도 다 너 인정하잖아."


괜찮다는 나를 떠밀어 침대에 도로 눕히자마자 야쿠와 카이는 앞다투어 말을 꺼냈다. 맞는 말이긴 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야쿠의 리시브를 볼 때마다 난 그와 동등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야쿠는 나를 정말 믿고 내 뒤에 서 있는 걸까? 야쿠에게도 내 등이 듬직해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믿을 수 있다고, 자신이 가장 리시브하기 좋은 곳으로 블로킹 해 줄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그런데 억지로 성장하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다가 앓아누운 꼴이라니, 나는 좀 자조했다.


"...멍청이."


웃으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짓는 나를 알아채고 야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말이 거짓말 같냐? 왜 그렇게 안달하는 건데, 이 한심한 놈아!"


야쿠가 소리지르는 통에 얌전하던 마음에 확 불이 붙었다.


"뭐? 한심한 놈? 야, 네가 내 맘을 어떻게 알아!"

"모르긴 뭘 몰라! 그럼 내가 리베론데 너보다 리시브 좀 잘하면 어때!"

"......"


카이는 조용히 일어나서 가방을 집어들고 나갔다. 현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 알아. 네가 나 힐끔힐끔 보는거 완전 티나거든."

"미안하게 됐네요. 근데 꼭 그래서 본 거 아닌데?"

"아무튼! 야, 난 네가 앞에서 막아줘서 리시브 할 수 있는거야."


야쿠가 이렇게 말을 잘했나? 대사를 준비해온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선 나를 하루에 두 번이나 말문 막히게 할 수는 없을거다.


"난 너 미... 미... 미, 믿는다고."

"...와. 너한테 그런 말도 다 듣고."

"웃기지 마!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같이 전국 갈 거잖아!"


나는 와하하 웃었다. 이런 말을 주고받는 건 처음이었다. 솔직한 말을 듣자 몸이 갑자기 가뿐해지는 것 같았다. 야쿠의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가 날 너무 후련하게 만들어 줘서, 정말로 감동받았다. 압박감과 고민, 이런 것들을 날려주고 우뚝 서 있는 야쿠가 왠지 커 보였다. 내가 웃는 걸 보고 야쿠도 씩 웃었다.


"이 몸이 직접 알려주니 좀 안심이 되나요? 쿠로오 테츠로 군?"

"네, 얏쿵 님."


나는 중얼중얼 대꾸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제 다시 어색해질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난 오늘 야쿠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침대 옆에 서 있는 야쿠를 끌어당겨 앉혔다. 가볍게 딸려오는 몸이 손에 닿자 마음이 정자에서의 그 날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가지 마."


눈치채고 즉시 몸을 일으키려는 야쿠를 붙잡았다. 도망치는 데 실패한 야쿠는 또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 풀이 죽었다.


"야쿠."

"......"

"야쿠!"

"어."

"왜 얘기하려고 하면 나 피해?"

"......"

"나 좀 봐."


나는 야쿠의 양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야쿠는 불안함이 깔린 눈으로 날 간신히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키스했잖아. 그 때."

"어..."

"왜, 왜 그 후로 아무 말 안 했어? 나는 솔직히... 잘은 모르겠지만 그 때 진짜 이상했어."


그리고 이어서 싫지 않고 계속하고 싶어져서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야쿠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따라 일어나기도 전에 등을 보인채로 입을 열었다.


"나는,"

"어?"

"나는 너 좋아해."

"야쿠,"


야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나는 붙잡지 못했다.



앓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난 내가 왠지 모르게 조금 냉정하고 차분해졌다고 느꼈다. 카이도, 켄마도 같은 말을 했다. 마음이 자란 걸까? 키도 더 자라있었다. 


코트에서 야쿠와의 호흡은 더없이 잘 맞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연습이 끝나면 야쿠는 카이를 끌고 사라져 버렸다. 카이는 미안하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나는 켄마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표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시 얘기 좀 하자고 문자를 보내고 복도에서 붙들어도 야쿠는 피하기만 했다. 


왜 좋아한다고까지 해놓고 피하는걸까. 얼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말도 하지 않으니 미칠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나도 얘 좋아하나봐. 맞구나, 좋아하는 거. 야쿠와 맞는 게 하나 없다고 물어뜯고 싸우던 내 마음은, 코트에 선 그를 따라잡고 싶다고 생각하던 내 마음은, 같이 전국에 가자는 그 말에 웃었던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먼저 키스해버린 내 마음은. 언제부턴가 야쿠를 좋아하는 마음이 되어 있었나보다. 젠장,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빨리 내 마음을 야쿠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카이, 나 좀 도와줘."


갑자기 문자로 너 좋아해, 하고 보낼 수도 없고, 난 카이를 붙들고 도움을 청했다. 그것도 야쿠가 같이 있지 않을 때를 노려 뒤를 덮친 거였다. 카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야쿠가 많이 힘들어해."

"뭐? 왜? 나 야쿠랑 얘기 좀 하게 해줘. 내 말은 안 듣잖아."

"걔한테 시간을 좀 줘라. 지금 아마 너랑 얘기 안 하고 싶을거야."

"왜...?"


카이는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해, 대신 전하라고 너한테 말한 거 아냐?"

"야쿠는..."


대답을 들은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카이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야쿠는 너를 잊을 시간이 필요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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