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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HQ!!

[오이스가] 꽃가지



스가른 전력 60분, 주제 '소풍'





꽃가지

오이카와 토오루 X 스가와라 코우시





w. 비누꽃









화려한 자수가 놓인 도포 소매 사이로 꽃가지를 건네는 손길이 다정했다. 흰 천으로 눈 아래를 가린 남자는 말없이 꽃을 받아들었다.


"오이카와 님, 저는 여인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

"그런데 왜 꽃을 주십니까."

"어떤 여인들보다도 그대에게 어울려."


오이카와라 불린 남자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시야를 방해하는 하얀 천을 잡아당겼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휘날리는 봄바람에 얇은 비단천은 공중으로 하늘하늘 날았다. 얼굴이 드러난 남자는 얼마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새하얀 옥면에 그림자를 만드는 속눈썹을 남김없이 눈에 담으며 오이카와는 슬쩍 웃음을 지었다.


"코우시. 이렇게 날이 좋으니 좀 걷자꾸나."


그리고 그의 손목을 아무렇지 않게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이런 그의 태도가 익숙한 듯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조금 걱정스러운 듯 등 뒤를 흘깃거렸다.


"재상 어른이 찾으시면 어떡합니까."

"그럴 일은 없다. 그리고 좀 찾으시면 어떠해? 봄 향기에 취하는 것을 누가 나무라겠니."


오이카와 토오루는 소매에서 섭선을 꺼내 살랑살랑 부쳤다. 그리고 바람에 향기를 실어보내는 꽃가지를 든 이를 부채 뒤로 살며시 내려다 보았다. 그가 직접 찾아낸 이 호위무사는 도성에서 제법 이름 난 무인 집안의 막내 아들이었다. 항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충실하게 자신의 등 뒤를 지켜온 스가와라였지만, 오이카와는 그가 조금만 더 마음을 열고 옆으로 다가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


"오이카와 님, 또 봄꽃 언덕으로 가시는 겁니까? 마차를 준비하라고 할까요?"

"되었다. 나도 두 다리가 있는 사내가 아니냐. 그것보다 너는 내 몸종이 아니다. 그런 시중까지 일일이 들 필요는 없어."


마냥 늘어지기만 하던 오이카와의 말끝이 처음으로 단호한 기색을 띠었다. 스가와라는 습관처럼 부복하려 했으나 오이카와가 그를 제지했다. 스가와라는 그보다 신분이 낮은 무신 집안 출신이었으므로 마땅한 예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으나 오이카와는 늘 이를 조금은 불편하게 여겼다. 스가와라는 꽤 오랜 시간 봐온 그가 원하는 대로 말없이 따라 걸었다. 손 안에 가칠가칠하게 만져지는 꽃가지에는 여러 송이의 하얀 봄꽃이 달려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걸으려니 어느새 봄꽃 언덕이었다. 도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곳을 알았으나 어쩐 일인지 오늘은 뛰노는 동네 아이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적한 풀밭을 밟고 올라선 오이카와와 스가와라의 걸음은 익숙하게 가장 큰 꽃나무 아래로 향했다. 봄이면 새하얀 꽃망울을 흐드러지게 피우는 나무는 이미 가벼운 봄바람에도 꽃잎을 잔뜩 휘날리고 있었다.




"어서, 코우시."


연둣빛 잔디가 파르라니 피어난 언덕에 오이카와는 거리낌 없이 앉았다. 옷자락을 단정히 추스르고 나서 그때까지도 가만히 서 있던 스가와라를 옆자리로 잡아끌었다. 이끌려 앉으면서도 허리에 찬 칼을 풀지 않는 모습에 오이카와는 눈웃음을 지었다. 스가와라는 코로 들어차는 가벼운 봄꽃 향기를 느끼며 바람을 맞다 문득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마주했다.


"몇 년 전 일인데도 아직 기억이 납니다."

"그래, 나도 그 생각을 했다. 해도 네 입으로 말하는 건 처음 듣는구나."


접선을 탁, 접은 오이카와는 그대로 손을 뻗어 바람에 흩날리는 스가와라의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겼다. 회색빛 구름 같은 머리칼이 손가락에 감겼다. 어느새 달라붙은 꽃잎 낱장들은 모른 체했다. 그대로 달고 있는 편이 더 지켜보기 좋았음이다.


"그 가지가 부러졌던 자리에도 저렇게 새 잎이 돋았습니다."


오이카와의 머리 위로 뻗은 가지들을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말을 이었다. 스가와라의 맑은 눈동자 안으로 굵은 가지를 밟고 올라섰던 어린 시절의 오이카와가 들어찼다.


"그 때 처음 봄나들이를 나와 오이카와 님을 뵈었습니다. 제가 꽃을 쳐다보는 걸 아시고 직접 나무로 올라가셨지요."

"코우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구나."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눈동자에 비친 꽃을 빨려들어갈 듯 바라보았다. 그가 회상에 잠긴 틈을 타 그 하얀 얼굴을 마음껏 뜯어볼 수 있었다. 어느덧 머리칼에서 미끄러진 손이 매끄러운 볼을 매만져도 스가와라는 생각에 빠져 멍하니 말을 이어나갔다.


"오이카와 님이 밟고 올라가신 가지가 부러져 나무에서 떨어지셨을 때가, 제가 살면서 가장 크게 놀랐던 날이었으니까요.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느냐? 내가 어리석어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너는 너무 어렸어."

"...그때도 다리가 부러지셨으면서, 벌떡 일어나셔선 꽃가지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 처음으로 하루빨리 무예를 익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다시 그렇게 몸을 상하시는 일이 없도록 지켜드리겠다 다짐했었습니다."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오이카와의 눈이 일순간 크게 뜨였다. 봄바람에 취한 듯 스가와라는 평소와는 달리, 아니 처음으로 오이카와의 앞에서 속마음을 내보이고 있었다.


"당시에는 오이카와 님께서 저를 계집아이로 오인하셨다 생각했습니다. 해도 저는 이제 오이카와 님을 지켜드리지 않습니까. 오늘도 혹 제가 연약한 여인처럼 보이셨습니까."


오이카와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웃었다. 그리고 스가와라의 허리로 손을 뻗어 무겁게 매달려 있던 칼을 풀었다.


"아니, 그때도 지금도 난 제대로 보인다. 여인들보다도 네게 이 꽃이 어울린다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인 스가와라를 보며 오이카와는 큭큭 웃었다. 아까부터 웃기만 하는 그를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눈치가 없는 편도 아닌데 오이카와는 늘 빙글빙글 웃고만 있어 그 심중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아직도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보여 늘 그랬던것처럼 농을 하시는 것이라 혼자 결론내렸다.


"그럼 금일은 내가 네게 청을 해도 되겠니."

"말씀하십시오."

"나도 꽃가지가 갖고 싶어졌다. 하나 따다 주렴."


말을 끝내고 오이카와는 편안히 몸을 늘어뜨린 채 눕는 시늉을 했다. 의아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던 스가와라는 곧 옷을 조심스럽게 털며 일어났다. 칼을 다시 허리에 차려는 손은 오이카와에 의해 막혔다.


"코우시 넌 늘 걱정이 너무 많아 탈이다. 칼은 두고 가도 된다."


잠시 망설이던 스가와라는 곧 그대로 나무로 향했다. 대충 보아도 무공을 발휘하지 않으면 가지에 손이 닿기란 어려울 것이었다. 도약할 자세를 취하는 스가와라의 등 뒤로 느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 날 직접 나무에 오르지 않았니. 너는 그리 쉽게 꽃을 꺾으려는 것이냐, 참으로 매정하다."


어쩐지 저를 놀리는 듯 즐거움이 섞인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역시 이미 언덕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다른 때보다 훨씬 들떠 있었다. 예쁜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다음 순간 스가와라는 어렵지 않게 나무에 올랐다. 그리고 가장 탐스러운 꽃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자라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약한 줄기가 그를 밟고 선 스가와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뚝 부러졌다. 순간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냈지만 스가와라는 딱히 걱정 없이 그대로 땅으로 떨어지려 했다. 발을 심하게 헛디딘 터라 등부터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으나 어차피 낙하 거리도 짧을 것이니 무공을 쓰면 충격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푹신한 잔디밭 대신 스가와라의 등을 받아낸 것은 익숙한 감촉의 비단옷을 두른 사내의 품이었다. 눈부신 속도로 날듯이 걸어와 스가와라를 받은 오이카와는 다리에 힘을 주지 않고 그대로 풀밭으로 넘어졌다. 연둣빛 풀밭에 오이카와의 하늘빛 옷자락과 스가와라의 검은 무복 자락이 뒤엉켰다. 스가와라의 귓가로 오이카와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오이카와 님...!"


서둘러 일으키려는 허리를 그대로 붙잡아 안았다. 빙글, 몸을 돌리자 이번에는 스가와라의 등이 땅에 닿았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허리를 내린 채로 회색빛 머리카락에 잔뜩 붙은 풀조각을 하나하나 떼어 주었다.


"이런, 나 때문에 네가 크게 다칠 뻔 했구나."

"...저는 다치지 않습니다. 아시면서 왜 그러셨습니까."


낮게 자신을 책망하는 얼굴에서 오이카와는 자신을 걱정하는 기색을 읽었다. 저 역시도 스가와라 못지 않은 무예를 익힌 몸이었다. 그의 충성스러운 호위무사는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듯 했다. 물론 오이카와는 언제나 즐겁게 그의 호위에 장단을 맞추어 주곤 했으니, 그의 걱정을 받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미안하다. 그러니 이걸로 그 날의 송구함은 잊어주렴."

"예?"

"네가 나를 염려하는 것은 기쁘다. 그러나 네가 그 일 때문에 죄책감으로 내 곁에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가끔 드는구나."

"오이카와 님."

"너를 약하게 여긴 적도 없다. 어린아이로 여기지도 않는다. 난 네가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어."


자신의 고민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오이카와의 말에 스가와라의 눈이 커졌다. 오이카와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그런 마음으로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그럼 어떤 마음이냐. 너는 이미 무관으로 입궁하는 것을 거절했다. 나처럼 한량으로 살길 원해 그리한 것이냐?"


스가와라는 다시 한 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어느새 다리가 옴짝달싹 못하게 얽혀들어있었다.


"......그 때문이 아닙니다. 또 저로 인해 몸을 상하셨던 것도 연유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야."

"그저 곁에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이카와 님이기 때문에 지켜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솔직한 눈이 오이카와의 얼굴로 향했다. 두 눈빛이 맞부딪히고, 오이카와는 만면에 지었던 부드러운 웃음을 잃은 채 스가와라를 내려다 보았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네 말은 이해하기가 힘들구나."

"저는 여인이 아니라 오이카와 님의 내자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늘 빈틈없던 오이카와의 반듯한 얼굴이 균형을 잃었다. 스가와라의 얼굴로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간 채 말을 이었다.


"계속해라."

"저는 여인이 아니지만 오이카와 님이 꽃을 주셔서 기뻤습니다."

"......"

"송구합니다. 금일은 어쩐 일인지 마음을 숨기는 것이 어렵습니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옛정에 관계없이 저를 내쳐주십시오."


오이카와의 몸에서 힘이 빠진 틈을 이용해 스가와라는 부드럽게 그를 밀어내고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오이카와를 등진 채 여전히 휘날리는 꽃잎들을 지켜보며 울렁이는 마음을 담담히 삭히려 했다. 그러나 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등 뒤에서 뻗어온 팔이 그를 세게 껴안았다.


"오이카와 님?"

"......너를 내칠 일은 없다."


스가와라는 간신히 고개만 돌려 오이카와를 마주보았다. 무복 사이로 부드러운 손이 들어와 스가와라의 양손을 감싸 잡았다.


"같은 마음이야. 한 번도 농담이었던 적이 없다. 내가 꽃을 꺾어주고 싶은 이는 너뿐이다."


둘은 문득 시간이 멈춘 듯 마주보며 꽃비를 맞았다. 봄바람에 뒤엉키는 머리카락을 치워내고 따뜻한 두 볼이 맞닿았다. 

쁜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뒤늦게 대답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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