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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HQ!!

[오이스가] 첫사랑



오이카와 안나옴 주의;








아, 내가 진짜 너를 좋아했구나.

고작 맥주 두 잔에 취해 엎드리며 나는 너의 얼굴을 가슴 아프도록 떠올렸다.







첫사랑

오이카와 토오루 X 스가와라 코우시





w.비누꽃









우리는 한 번도 사귄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나는 한 마디도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그는 내 첫 키스를 가져가고, 내 첫 섹스를 가져가고 그리고 내 마음만은 그대로 돌려주고 떠났다. 내가 더 사랑을 원할 때마다, 확인하려 할 때마다, 관계를 정립하려 시도할 때마다 그는 구실 좋게 빠져나갔다. 더 원하는 내 마음이 마치 쿨하지 않은 어린애의 행동인 것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게 멋진 것처럼 포장하고 돌려 말하며 우리 사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티를 내기 싫어서, 지기 싫어서, 그 후에는 나 혼자 좋아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마침내는 내 마음도 별것 아니었을 거라고 애써 합리화하며 나 자신을 외면하고 그를 보내주었다. 내가 그를 진심으로 깊이 좋아했음을, 그리고 마음에서 전혀 떠나보내지 못했음을 나는 더이상 그에게 구질구질하게 연락해 매달릴 구실이 남지 않았을 때 진정으로 깨달았다.

 

그래,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이토록 가슴 저리고 절절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면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정말로 사랑했다. 밤에 자리에 누우면 그 얼굴과 우리가 나누었던 것들이 떠올라 잠들기 힘들었고, 낮에도 혹시나 연락이 올까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실낱같은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면 내 마음은 땅끝까지 파내려갔다. 이런 나를, 누구의 앞에서도 내 입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나를 마주하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끈질기게 바라보았던 내 눈빛, 밀어내는 그 앞에서 상처받았던 얼굴, 어떻게든 그의 텅 빈 감정을 합리화해보고 나에 대한 무심한 행동을 변명해보려 했던 내 자신을 지켜보았던 그 모두가. 그래도 나는 애써 의연한 척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조금 아까까지는.


속에서 올라오는 게 토기인지 울음인지 나는 몰랐다. 그냥 끙끙거리며 류네 집 코타츠 위에 엎드렸고, 그런 내 머리 위로 여러명이 혀를 쯧쯧 찼던 것 같다. 


"야, 스가선배 폰 좀 줘. 라인 못 하게."


치카라의 목소리였는데. 들리기는 하는데 대꾸할 기운은 없었다. 축 늘어진 내 손에 단단히 잡혀있던 핸드폰을 누군가 빼내 갔다. 그래, 나를 좀 너네들이 말려 줘라. 절대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내 다짐이 또 무너지면 너무 비참하잖아. 그래도 나는 아직 그런 생각이 들어...


"......그래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얼마쯤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나 때문에 또 가라앉은 것쯤이야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술의 힘을 빌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정신승리를 하고 싶었다. 비록 지금까지 아무도 그래그래 하며 맞장구쳐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고3이니까... 성적도 잘 내야하고 바쁘니까... 정식으로 사귀고 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워서 그러지 않았을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음에도 또 말을 이어가면서 나는 이미 아주 살짝 타올랐던 희망의 불씨가 꺼져버렸다는 걸 알았다. 그래, 내가 미련한 놈인거다. 어리숙하고, 나쁜 놈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내가 바보 멍청이였다. 이게 다이치의 일이었으면, 아사히의 일이었으면, 혹은 시미즈든 얏짱이든 다른 우리 부원들 중 누구의 일이었으면 나 역시 혀를 차며 말렸을 일이었다. 야, 정신 차려, 걔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아? 그냥 너 갖고 논거야, 재미 좀 보고 끝낸거야, 빨리 잊어. 내가 했을 말들이 이미 수없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어도 나는 다 알면서 그를 놓을 수가 없었던 거다. 왜냐면 좋아했으니까. 처음이었으니까.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들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슬쩍 일어나자마자 눈이 마주친 건 보기 드물게 굳은 표정의 니시노야였다. 류의 책상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노야는, 나보다 15센치는 작은 주제에 너무 무서운 얼굴을 해서 나는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제 진짜 얘기 안 할게. 다 잊었어."


술기운은 올라오고, 몸도 머리도 무겁고 해서 옆에 앉아있는 다이치의 다리를 베고 누워버렸다. 예상대로 다이치는 날 밀어내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 가득한 눈과 마주치는 건 오늘은 사양하고 싶었다. 눈을 감아버리자마자 까무룩 잠드는 와중에도, 뜨거운 한 줄기 무언가가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끼면서도 내가 떠올린 건 오이카와의 얼굴이었다. 그 점이 정말 참을 수 없이 비참했다.





온통 깜깜한 방에서 눈을 뜨면서도 나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하루 24시간을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눈 감기 전에 했던 생각이 눈을 뜨면서도 이어지는 건 너무 심하다 싶었다. 심지어 꿈에서도 그 얼굴이 보이는데, 진짜 어떡해야 하지... 



류의 집에서 조촐하게 가졌던 단합회를 빙자한 나의 위로 모임에서 술을 마신 건 나뿐이었다. 그것도 류가 집 냉장고에서 몰래 가져다 준 맥주 두 캔. 어른스러운 기분을 낸다고 류 아버지의 맥주컵에 그걸 꽐꽐 따를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제법 유쾌했었다. 다 엎어버렸지, 내가... 말짱한 정신을 도로 놓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나는 제발 내가 잠들어버린 다음에는 다시 분위기가 살아났기를 바랐다. 내 양옆에서 이불을 덮고 잠든 아사히와 다이치를 번갈아 바라보며 뭐라 할 수 없는 고마움과 미안함도 같이 느꼈다.


아사히의 머리맡에 놓인 내 핸드폰을 집어 습관처럼 메신저를 확인하면서 나는 씁쓸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오이카와가 나를 찾을 리 없는데.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은 채로 나는 어둠 속에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마주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 자꾸만 얼굴을 내밀어서, 눈을 감아도 그 어둠 속에서 또 눈앞에 그려져서. 처음 코트에서 만났던 자신만만한 얼굴, 같은 세터로서 질투심과 동경을 함께 느꼈던 순간, 살인 서브를 넣을 때 그 공에 맞은 것처럼 산산조각났던 내 마음... 날 보며 씩 웃었던 모습과 시합이 끝난 경기장의 외진 곳에서 닿아왔던 따뜻한 입술. 좋아한다고는 한 적 없지만 예쁘다고, 넌 상큼한 애라고 해서 처음으로 하루 종일 거울 앞에 서있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리고 그가 원해서 했던 첫 섹스. 여자애처럼 굴면 지겹다고 느낄까봐 좋은 척 연기했었다. 점점 더 좋아졌어도 여전히 아프고 힘들었던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몇 번째였지, 아무튼 몸을 섞던 날들과 그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던 땀방울, 내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모습. 아, 이 모든 걸 담담하게 묻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니 세상은 너무나 무심하고 잔인했다. 나는 아파 죽겠는데 왜 하루하루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거지, 왜 시간이 멈추지 않는거지, 왜 내가 아픔을 삭이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거지. 


"으, 흑..."


나는 울고 말았다. 친구들 여러 명이 여기저기 누워 잠든 컴컴한 방 안에서, 제일 친한 친구들이 내 비참한 울음 소리를 들을까봐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은채로 숨죽여 울었다. 


사무치도록 찾아온 후회는 모두가 생각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나를 가지고 논 오이카와를 바보같이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사실보다, 내 마음조차 한 번 온전히 내보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후회로 남았다. 그를 사랑했음에도 알량한 자존심이 앞서 한 번도 제대로 맞부딪혀보지 못했다. 온몸으로 사랑해 달라고 애원했고 나를 떠나가는 오이카와에게 쿨하지 못하게 계속 연락해대면서도 한 번도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나를 만나달라는 그 말을 솔직하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면 달라졌을까, 마음이 돌아서 나를 다시 안아줬을까, 하고 생각했던 건 바로 얼마 전까지였다. 지금은 내 소중한 마음을 소중히 다루지 못한 나 자신이 한심해서, 어디에 예쁘게 꺼내보이지도 못하고 손에 쥐어 주지도 못하고 오이카와의 발치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버려졌을 내 마음에 미안해서, 그래서 후회가 남았다. 


그대로 입고 잠들었던 교복 셔츠 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어떤 아픈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고통이 옅어진다는 걸, 시간이 내 마음을 많이 도와준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다려야 했다. 언젠가는 마음을 후벼파는 이 고통이 지나가기를,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코트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기를. 나는 한참 동안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처음 해 본 사랑의 무심함에, 그 허망함에 상처받은 내 마음이 다시 채워지길 간절히 소망하면서, 그럼에도 한구석 남은 미련을 놓아버리는 게 어려워 다시 잠들지도 못하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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