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HQ!!

[카게스가] 그 달의 기억

스가른 전력 60분, 주제 '윤달'

카게스가 AU






그 달의 기억

카게야마 토비오 X 스가와라 코우시






w.비누꽃









"카게야마."

"......"

"아, 거 참. 토비오!"

"네, 스가 씨."


길에서 주워온 고등학생은 이제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으면 대답도 안 한다. 나는 목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가래침을 꾹꾹 삭이며 부러 거칠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가서 도시락 사올래? 간 김에 담배도."


보기좋게 둥근 머리통을 감싼 검은 머리칼이 절레절레 흔들렸다.


"스가 씨는 담배 끊어야돼요."

"난 아저씨라 밥이랑 담배가 없으면 죽어요."


카게야마는 내 쪽을 한 번 흘깃 봤을 뿐, 곧 다시 TV에 집중했다. 아, 지겨운 배구 경기. 나를 등지고 앉아있는 얄미운 등을 팍 째려봐도 미동도 없다. 마침 내 옆에 놓여있던 리모콘을 집어 저 보기 싫은 상자를 팍 꺼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나를 제대로 돌아보는 얼굴을 다짜고짜 붙잡고 입을 맞췄다. 놀라서 굳어 있던 고등학생의 몸은 곧 풀어져 내 손 위로 따뜻한 손을 겹쳐 온다. 그 온기가 조금 두려워서, 꾹 맞붙어 있던 입술을 떼었다. 카게야마의 눈이 아쉬운 빛을 띠고 반짝거렸다.


"스가 씨, 더 해도 돼요?"

"야... 고등학생은 원래 다 이렇게 돌직구야? 난 안 그랬는데!"

"안고 싶어요."


대답도 안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어느새 눈빛이 진지하다. 그 눈빛을 버텨내기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아, 어제도 죽어라 했는데. 모르는 척 한 번만 더 깔려 줄까. 그래도 애써 흐려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이 다음은 갔다 오면 해주지."


카게야마는 말이 많지도 표정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고등학생답게 어리게 느껴지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것에만 반응하고 관심을 두는 타입이었다. 그런 그 애가 특별히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것이 배구, 그리고 나라는 사실에 주책맞지만 속으론 항상 좋아했다. 나는 입가에 떠오르려는 웃음을 감추고 카게야마의 윗옷 주머니에 내 지갑을 찔러넣고 발로 등을 떠밀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입을 삐죽대며 집을 나서는 뒷모습이 말도 안 되게 너무 기대고 싶게 생겨서, 하마터면 달려가 끌어안을 뻔 했다.


부모님의 이혼 후 술에만 의존하며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피해 배구공과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도망쳐 나온 카게야마를 만난 곳은 내 가게 앞 놀이터였다. 기본적으로 약하고 여린 애는 아니었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더 같이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무작정 나왔다고. 언제부턴가 작은 것에도 질질 짜게 된 나는 뻑뻑 피우던 담배도 떨어뜨린 채 그 앞에서 손을 붙들고 펑펑 울었다. '왜 우세요? 저 대신 울어주는 겁니까?' 고교 배구부에서 이름 좀 날린다더니 군기가 바짝 든 말투로 좀 부끄러운 듯 말을 건넨 그는 입고 있던 져지 소매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내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이미 소용도 없는 후회를 수천 번째로 해대면서, 나는 카게야마가 자리를 비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침대 밑에서 잽싸게 꺼낸 상자 위에 쌓인 먼지가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지워졌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좀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변한 것 같아 자조했다. 그래도 옷으로 얼굴을 북북 문질러 닦고 속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려는 울음을 침과 함께 삼켰다. 오늘은 떠나야 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좀 잘해 줄걸. 


"미안해."


직접 들려주지 못할 말들은 추리고 추려 편지로 남겼다. 이런 주제에 너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했어. 이런 말들. 그러고도 남은 것들은 그가 없는 사이 먼지 낀 상자 위로 줄줄이 추락해 부서져 버렸다.


"그래도 같이 있어서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았다, 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카게야마는 불이 꺼진 것 같던 내 삶에 잠시 찾아온 에너지였고 행복이었다. 이기적인 나는 그로 인해 짧은 시간이나마 행복했지만, 그래서 나는 카게야마가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지 않길 바랐다. 아니, 다 거짓말이다. 진심이 어린 그 눈빛이 너무 좋았다. 안 되는데, 하면서 너무 깊이 사랑에 빠졌다. 사실은 그를 만난 것을 후회한 게 아니라 막 살아온 지난 날들을 후회했다. 너를 만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텐데. 처음으로 제대로 살고 싶어졌다. 나는 그애에게서 구원받았다. 고등학생 주제에, 집도 나온 주제에, 열 살은 어린 주제에 그 애는 자신도 몰랐겠지만 내 상처를 남김없이 덮어주었고 찬바람만 불던 내 마음을 채워주었다.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후회할 때는 이미 늦었다는 세상의 진리를 그와 함께하는 하루하루 뼈저리게 실감하며, 그리고 마음을 베어내는 고통을 배우며 나는 차근차근 그와 헤어질 준비를 했다.


수없이 마음속으로 연습한대로, 상자를 방바닥 한가운데 밀어 놓고 곧바로 뒤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나는 카게야마가 지나갔을 길과 정 반대로 걸으며, 내 발목을 계속해서 붙잡고 끌어당기는 모순과 끊임없이 싸웠다. 나를 쫓아와 잡아주길, 아니 나를 발견하지 말길,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어져서 무작정 달렸다. 아직 바람이 찬 계절이니까, 티셔츠 차림이니까 그래서 내 몸이 이렇게 떨리는 거겠지. 울면서, 부들부들 떨면서 뛰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또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았다. 


신기하게도, 목적지에 다다라 내리자 내내 터질 것처럼 요동치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침착하게 눈물을 닦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것은 검은 어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도 내 손을 감싸던 온기와 나를 내려다보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카게야마가 받아든 것은 작은 단지가 담긴 상자였다. 그는 이미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눈앞의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수 있었다. 지옥 같았던 2월의 마지막 날, 그 후로 며칠이 지난 뒤 그가 되찾은 스가와라의 전부였다.


"멋대로 뛰쳐나갔던 게 지병 때문이었을 줄은 이 쪽도 몰랐어."

"......"

"참, 겁쟁이 아니냐? 그렇게 구질구질한 걸 싫어하더니, 스스로 아파 죽는 것도 싫어서 조직 손이나 빌리고. 그래도 한솥밥 먹은 세월이 얼만데."

"...가세요."

"뭐? 야, 너 스가와라 이거지?"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채로 왼손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남자 앞에서 카게야마는 말없이 상자만 내려다보았다. 


스가와라가 방바닥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간 상자에서 카게야마는 옷 한 벌과 서류 뭉치, 그리고 편지를 찾았다. 가진 가게와 집이 어느새 전부 자신의 명의가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편의점 봉지 옆으로 서류를 내던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읽고, 그리고 상자 바닥에 깔려 있던 옷으로 시선을 옮겼다. 삼베로 된 옷 한 벌. 그는 자신이 이 수의를 입지 못할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도 이런 걸 남기고 간 이기적인 사람. 겨울의 끝자락이 불어 보내는 칼바람을 맞으면서 며칠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신이 증오스러워 차게 식은 방에서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받아들여야 했다. 이별을.



그는 남자가 떠난 방에서 상자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모로 누웠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잠시 알았던 남자는 정말로 겁쟁이였다. 아무리 어린애여도, 눈치가 없어도, 그런 기침 소리에 담긴 위험함을 모르지는 않았다. 자신이 집을 비울 때마다 스가와라는 비밀을 하나씩 늘려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카게야마도 그가 없을 때마다 비밀을 하나씩 찾아내 주었다. 비타민 병에 든 약을 찾아내고, 검붉게 물든 채 침대 밑에 쑤셔박힌 옷을 찾아내고. 그리고 침대 밑에 새로 처박힌 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게 되었던 날, 그는 연습을 핑계로 하루 종일 뒷산을 내달리며 울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가 알면 더 아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숨기는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끝끝내 아무 말 없이, 너무나 갑자기 곁에서 사라졌다.


"이런 편지 한 장만 남겨놓고..."


그가 떠났던 날 사온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맵게 퍼져나가는 익숙한 냄새에 매달려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운좋게 윤달에 떠나게 되었으니 너는 딱 4년에 한 번씩만 나를 기억해 달라고. 그래주기만 해도 나는 정말 좋을 것 같다고. 그의 글씨는 그를 닮아 가늘고 홀쭉했다.


"말 안 들을 건데요, 스가 씨."


카게야마는 오랜 습관대로 입을 삐죽이며 끝이 젖은 담배를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비벼 껐다. 찬 빛을 비추었던 지난 달은 이미 이지러진 지 오래였다. 기침을 해대던 그도 없고, 그 때의 그 달도 없고. 이제 원망할 상대는 더이상 같은 하늘 아래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틀어 창 밖에 떠오른 애꿎은 새 달을 노려보았다. 네가 좀만 더 빨리 왔었더라면. 그와 함께 썼던 이불을 끌어당겨 아무렇게나 덮었다. 


그렇지만 그 달이 떠난다고 당신을 보낼 줄 알고? 사실은 매일같이 기억해 달라는 뜻인 거 다 알아요. 


끝까지 솔직하지 못했던 남자를 떠올리며 웅크린 채 그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부디 꿈에서는 그 달이 뜨지 않기를 빌었다.












'단편 > HQ!!'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마후타/코가후타] 각자의 봄  (4) 2016.04.14
[오이스가] 꽃가지  (0) 2016.03.20
[쿠로스가] 신의 선물  (0) 2016.03.06
[오이스가] 첫사랑  (0) 2016.02.24
[다이스가] 어느날 갑자기  (0) 2016.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