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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HQ!!

[쿠로스가] 신의 선물

스가른 전력 60분, 주제 '신'





신의 선물

쿠로오 테츠로 X 스가와라 코우시




w.비누꽃









신이 있다면 내게 이럴 수 없다. 그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나를 이렇게 살아가게 해도 좋은건가. 아니면 신은 흔히들 말하는 성스럽고 자비로운 목적으로 우리를 만들어 놓은 게 아닌건가. 문구점에서 집어와 아무렇게나 굴려도 좋은 보드게임처럼, 좀 더 좋게 봐줘서는 교묘하고 복잡하게 설계된 소프트웨어 게임처럼, 이 세상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건가. '신'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의 심심함을 풀어줄 게임 캐릭터들로, 내가 생각 없이 플레이하던 RPG게임 속의 그들처럼. 그럼 나는 신이라는 존재가 괴롭히기로 운명을 결정한 안타까운 놈인가보다. 고작 게임 속 캐릭터 따위를 죽인다고 죄책감 같은 건 느낄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나 역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죽어 버리기로 했다. 아니, 그럼 내가 죽으려고 집 옥상까지 기어올라온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신이라는 작자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정해놓은 나의 결말이겠지. 그러니 나는 더더욱 당당해졌다. 죽어라, 스가와라 코우시. 짧은 18년 인생의 전부를 외롭고 쓸쓸하게 살다가, 끝끝내는 차가운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어 버려라. 내 마음속의 외침이 꼭 신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아니, 아마 맞을 것이다. 


나는 살면서 나를 사랑해 준 단 한 사람이 떠오르려는 것을 맘 속 저어기 깊은 곳으로 꾹꾹 밀어넣어 버렸다. 내가 그만 끝내버리려 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양 손에 죄책감을 싸들고 다니며 나를 말렸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너도 나를 말릴 수 없어. 어차피 너는 먼저 떠났잖아.


"야, 미안한데 너 아직 때가 아니거든?"

"악!"


여긴 우리 집 옥상인데! 어두컴컴한 옥상 구석에서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와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비명을 꽥 지르고 나니 슬슬 무서워졌다. 옆에 놓인 먼지 낀 화분에 위태롭게 꽂혀있던 녹슨 꽃삽을 집어들었다. 더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 괴한의 뒤통수를 후려칠 만한 건 이것뿐이었다.


"......풉."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달빛이 비추는 곳까지 크게 한 발짝을 옮겨왔다. 큰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가 났다.


"어......"

"프로필 사진은 하도 예쁘게 생겨서 여자앤 줄 알았는데. 실물은 그냥 덜자란 남자애잖아."

"......"


손에서 떨어진 꽃삽이 옥상의 시멘트 바닥과 부딪혀 깨지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녹슨 꽃삽이 부서지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남자가 말하는 소리도 웅웅거리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귀가 멀어버린 것처럼, 그가 입을 벙긋대는 걸 보면서도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새하얀 깃털이 빼곡히 박힌 날개를 등에 달고 서 있는 눈앞의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었을 사람이기도 했다.


"이름, 스가와라 코우시. 나이, 18세. 양친은 교통사고로 사망. 유산을 노린 친척들의 잦은 학대로 네 번 자살시도를 함. 아직 갈 때가 아니라서 그때마다 친구가 발견해서 살아남. 그리고 죽기로 되어 있던 네 번째는... 엥?"


이리저리 뻗친 검은 머리카락, 큰 키, 잘빠진 몸매에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검은 옷들. 살아있을 때보다 더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 


"쿠로오..."


남자는 손에 든 서류를 계속해서 훑어 내려갔다. 그러면서 내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마침내 가까이 선 그는 나른하게 내리깔린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너 헛짓거리 좀 그만하게 하라고 보내서 왔는데. 얘야, 눈 깔아. 나 천사야. 정중히 인사해 빨리."

"쿠로오...!"


처음부터 귀담아 듣지도 못했던 그의 말 따위는 흘려버리고 눈앞에 선 쿠로오를 정신없이 끌어안았다. 아, 신이 정말 있나봐. 오늘부터 믿을게요, 감사합니다. 너를 다시 만나려고 내가 아직 살아있었나봐. 그래서 아무리 죽을래도 죽을 수가 없었나봐.


"엥? 야, 야? 뭐야. 얘, 꼬마야? 너 나한테 빠져버렸니? 형아는 천사예요. 이러시면 곤란하세요. 빨리 떨어져라, 응?"

"쿠로오...쿠로오! 으엉엉, 흡, 왜... 왜 이제 왔어...! 끄흑, 끅!"


쿠로오와 있을 때는 난 힘들 때마다 그냥 울었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질질 짜고 있으면 쿠로오는 눈물을 닦아주고, 코를 풀어주고 내 눈밑의 점을 툭툭 건드리고 그러면서 우리는 안고 누워있곤 했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면서 나는 무조건 지금이 현실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없어 계속 참아온 울음을 터뜨리며 넓은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내 옷 다 젖잖아. 비켜봐 일단."


쿠로오는 나를 밀어냈다. 그는 축축해진 옷을 털며 종이뭉치를 쥔 손으로 우리 사이를 막았다. 그래서 나는 더 다가가지도 못하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그 앞에 훌쩍이며 서 있었다.


"일단 신상은 확인됐고. 너 임마, 도대체 자살 시도가 몇번째야? 너 황천길 가던 영혼 맨날 집으로 돌려보내느라 하늘에서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아니 나는 못보긴 했는데. 아무튼 너 저기서도 아주 소문이 자자해!"


그의 손가락이 쿡, 내 이마를 밀었다. 닿은 부분에서부터 시원한 느낌이 퍼져나가고 조금 머리가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슬슬 나는 지금 내가 꿈 속에 있는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이 남자는 분명 쿠로오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쩐지 내가 알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쿠로오 아니야?"

"넌 할 줄 아는 말이 쿠로오밖에 없냐?"


어이없다는 듯 콧김을 내뿜으며 그는 손가락으로 종이 뭉치를 훑었다. 내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종이를 넘기며 그가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난 천사야, 쿠로오가 아니고. 그게 누군진 찾아봐야 알거든? 나도 세례받은지 얼마 안 돼서. 왜 왔는지 설명할 테니까 일단 좀 들어. 넌 지금 다섯번째로 자살시도를 했어야 해. 근데 하늘에서 하도 귀찮게 구니까 한 번 한걸로 치고 좀 말리고 오라더군. 너는 원래 이번에 죽었어야 하지만, 여기 수정된 부분이 있어."


그는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턱을 손으로 쓸었다. 쿠로오가 고민할 때마다 버릇처럼 그러던 게 생각나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처, 천사님."

"왜."

"그쪽은 그럼 세례를 받기 전엔 뭐였는데요?"

"나...?"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느새 그의 검은 가죽 옷자락을 꽉 붙든 내 손을 부담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인간."


아.


아아..


"천, 천사님."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왜 또 질질 짜는 목소린데."


나는 잠시 울음을 참기 위해 숨을 골랐다.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고, 더이상 꿈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 앞에 서있는 천사, 아니 쿠로오에게 다시 물었다.


"인간이었을 때 기억 안 나요?"

"...물어보지 마. 천사가 그런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져."


그는 정말로 머리가 아파 보였다.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리려고 해서,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요! 안 물어 볼게요!"

"아무튼, 수정된 부분을 읽어 줄게. 너는 차에 뛰어들었던 네 번째에 죽었어야 했지만, 그때 누가 네 앞에 끼어들었어. 기억 나지?"


나는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였다.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정신을 온통 잡아먹은 병이 나를 멋대로 잡아끄는 것은 누구도, 쿠로오조차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죽고 싶어져 차도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누군가 뒤에서 내 허리를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이 세상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그래. 그 때 죽는 건 너였는데, 네 친구도 충격으로 잠시 영혼이 튀어나왔거든. 그 때 그 영혼이 죽음의 문턱 앞에서 너와 운명을 바꿨다."

"......"

"누구나 이런 선택의 기회는 있거든, 사실. 아무도 그런 선택을 안 해서 그렇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천사가 된 쿠로오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죽을 걸 알면서도 다른 이를 구한 인간의 영혼은 고귀하다. 누구보다 맑고 순수한 존재가 되지. 그래서 그는 너에게 두 번의 새로운 기회를 선물하고 떠날 수 있었어. 그가 바랐던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넌 그때도 지금도 죽을 수 없었던 거야. 너, 다음에도 또 이짓거리 하면 그땐 진짜로 죽어. 그래도 또 이럴 거냐?"

"...쿠로는."


쿠로오가 무엇을 원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살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생전에 그가 그렇게 노력했던 것처럼, 죽은 듯 자려는, 자면서 죽어버리려는 나를 깨우고, 학교에 같이 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고. 죽으려는 나를 찾아낼 때마다 나를 붙들고 같이 울었던 게 너였잖아. 그래, 그와 나는 이렇게 만나 함께하기 위해서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쳤던 것이리라. 나는 이렇게 결론내려 버렸다. 그 때 내가 죽었어도 쿠로오는 나를 따라 자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애에게는 사랑했던 사람을 끝까지 기억하며 주어진 목숨을 다해 살아가는 게 올바른 일이었을 것이 틀림없으니까. 어쨌든 너는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나에게 목숨을 양보했겠지만, 네가 준 소중한 기회를 반드시 잘 사용하도록 할게. 이번엔 정말이야.


"천사님, 그럼 나 좀 도와줘요."

"뭐?"

"내 친구가 준 고귀한 목숨이라면서요. 난 우울증 환자예요. 언제 또 뛰어내릴지 모르는데 야박하게 굴거예요?"


천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쿠로오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관심 없는 것처럼 느슨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사실은 누구보다 정이 많고 뜨거웠다. 그가 생전의 기억을 잃었다 해도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야아, 천사라니... 소름끼치게 어울린다. 그의 검은 옷자락을 휘날리게 하는 깨끗한 밤바람을 맞으며 그만 눈물이 났다.


"나 좀 보러 와줘요. 난 아무도 없어요. 천사님이 없으면 다음에 나 볼땐 지옥 문턱일지도 몰라요."

"......"

"모른 척 하려는건 아니죠..."


천사는 서류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로 나를 이리저리 재 보는 것 같았다. 짝다리를 짚고 선 그는 한쪽 다리를 불안한 듯 달달 떨었다.


"......일 년에 한 번은 올게."

"아, 그때는 저기 강으로 만나러 오세요. 친척 누군가 거기 뿌려줬겠지."

"......반 년."

"나약한 영혼 한두 번 보시나."

"......아, 나 할 일 많은데. 신입이란 말야."


큭, 웃음이 터졌다. 쿠로오의 뒤로 비치는 달빛에 얼굴을 맡기며 나는 어둠이 가신 얼굴로 웃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사는 끙, 소리를 내며 내 옆에 주저앉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긴 다리를 쭉 뻗은 그의 옆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지극히 충동적인 손길로 바람에 휘날리는 내 머리를 단정히 넘겨주었다. 나는 울컥해서 고개를 돌렸다.


"매일 와요. 와서... 나 잘 있는지 좀 확인해줘요. 진짜 죽기 싫어서 그래요."

"쩝."

"그리고 내가 죽으면 천사님이 나 데리고 가줘요. 그럼 나도 천사 될 수 있는거 아니에요?"

"...너는 여러번 죄를 저질렀지만. 그의 영혼이 너까지 정화한 건 사실이야."


신은 나에게 다시 너를 보냈다. 그게 신의 뜻이라면 그는 자비로운 존재일까 아니면 한없이 잔인한 존재일까. 나의 삶이 곧 신의 뜻이라 해도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믿는 대로 움직여볼 테다. 


"그럼 됐어요."


나는 아까처럼 계속 웃으며 옥상 난간 밖의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찬 바람이 눈물을 남김없이 말려주었다. 천사는 옆에서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며 끝없이 궁시렁거렸다.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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