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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HQ!!

[리에야쿠] Enchanted 02



*




내가 애들을 가르쳐야 된다니진짜 미치겠다.’

켄마… 용서 못 해.’


스물이 되자마자 쿠로오와 야쿠는 나란히 왕립학교에 교사로 보내졌다그 때 이미 쿠로오는 근위대 부대장이었고야쿠는 지금과 같은 궁정대마법사였다궁 안의 일만 해도 산더미인데 이른 오전과 저녁에는 학교에 와서 강의까지 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둘 다 툴툴대며 발로 돌멩이를 걷어찼다.


야쿠조심해넌 어려 보여서 애들이 만만하게 볼지도 몰라어째 나만 늙는 것 같냐.’

…….’

하긴네 마법 실력은 온 나라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괜한 걱정이네먼저 간다.’


야쿠의 성장이 멈추었다는 걸 켄마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그 말만 남기고 쿠로오가 검술 훈련장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자 야쿠는 그의 등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고급 마법 수업은 삼 층으로 올라가야 했다발걸음이 무거웠다.


!’

미안미안!’


그 때발끝을 내려다보고 걷던 야쿠에게 누군가 돌진해 부딪쳤다엄청난 힘에 야쿠는 바닥으로 나동그라졌고달려온 소년도 야쿠의 몸 위로 넘어졌다은발머리의 잘생긴 소년이 얼굴을 찡그린 야쿠를 허겁지겁 일으키며 연신 사과했다얼굴은 어려 보였지만 긴 팔다리에 제법 각 잡힌 어깨가 딱 봐도 검을 다루는 것 같았다소년과 야쿠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소년의 입이 벌어졌다.


…….’

됐어가던 길 계속 가봐.’


야쿠는 소년을 놔둔 채 흙먼지가 묻은 옷을 털었다그러다 끈질기고 따가운 시선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목검을 든 손을 어정쩡하게 늘어뜨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내가 누군지 아나보네야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인사는 됐,’

너 무슨 반이야처음 보는데난 하이바 리에프야.’

…….’


젠장야쿠는 저주에 걸린 자신을 또 한 번 마음속으로 저주했다어떻게 봐도 지금 제 모습은 저 소년과 동년배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자신이 누구라고 설명하려다 야쿠는 그만 말을 멈추었다갑자기 그런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대신 그는 망토의 모자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렸다그리고 등을 돌려 걸어갔다그러나 하이바 리에프는 끈질기게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나 지금 검술 수업 가는데수업 없으면 너도 구경 올래쿠로오 테츠로 근위부대장님이 오신대완전 멋있는 분이라던데나는 궁에 들어가서 전하를 호위하는 게 꿈이거든물론 헛꿈 꾸는 건 아니야넌 모를지도 모르는데내가 이 학교 검술 수석이거든물론 무술도열 세 살인데 졸업반 형들보다 잘 한다고아마 궁에서 스카우트 올 거야근데 마법은 전혀 못 해마검사가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너 망토 입은 거 멋지다마법사 되려고진짜 신기하다마법은 어떻게 하는데궁정대마법사님도 오신다면서그 수업 들으러 가는 거야?’


야쿠의 머리가 지끈거렸다소년의 말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그 때 야쿠가 한 번만 시선을 주었다면 리에프의 뺨이 온통 붉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그가 계속 대답이 없자 리에프가 안절부절못하며 야쿠의 긴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거 참 귀찮네!’

이름도 안 알려주고대꾸도 안 해주고 너무해귀찮다니난 너랑 친구 되고 싶은데넌 뭘 좋아해?’


리에프는 이제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그러면서도 눈빛은 집요했다야쿠가 대답해주지 않으면 그 기대 중이라는 수업도 빠질 기세였다아니면 야쿠를 훈련장으로 질질 끌고 갈 수도야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리에프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 게 뜨겁게 느껴졌다그가 손가락을 한 번 딱하고 퉁겼다공중에서 피어나듯 나타난 분홍색 솜사탕이 저절로 돌진해 리에프의 입을 가득 채웠다.


……!’

난 야쿠 모리스케마법을 좋아하고마법 못 하면 관심 없어.’


야쿠는 그제야 웃으며 조용해진 리에프에게서 돌아섰다.

 




요즘 학교는 어때?’

야쿠 따라다니는 애 있어켄마 너도 구경 올래?’

시끄러워.’


야쿠가 쿠로오에게 빵을 날려 보냈다쿠로오는 제 얼굴로 날아오는 빵을 날쌔게 잡으며 쿡쿡 웃었다켄마도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야쿠는 둘을 애써 무시하며 나이프로 거칠게 고기를 썰었다.


쓸 만한 애야?’

너도 아는 애야하이바의 막내아들.’

아아어떡하지야쿠난 하이바 리에프가 열다섯이 되면 궁으로 불러올 생각인데.’


고기가 잘 썰리지 않았다야쿠는 포크를 들고 아예 스테이크를 짓이겼다.


난 상관없어마음대로 해.’

처음엔 쟤가 같은 학생인 줄 알았대그렇게 일주일을 쫓아다니다 결국 마법 수업까지 따라 들어왔는데야쿠가 누군지 알게 되고서도 포기를 안 하더라고나 혼자 보긴 아까운데오늘도 거절당하고 우는 걸 달래느라,’


켄마는 금 술잔 뒤로 웃는 얼굴을 감추었다그리고 식탁 밑으로 쿠로오의 무릎을 한 번 걷어찼다하며 쿠로오가 애써 정색했다이 이상 야쿠를 놀렸다간 둘의 싸움에 왕의 식당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야쿠는 은 술잔에 따른 포도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리에프에게서 열 번째로 고백을 받은 날이었다.

 







마법에 걸린 사랑,

Enchanted 02



 




, 재미없다. 야쿠는 잉크에 담갔다 뺀 둥근 촉 펜으로 종이에 의미 없는 낱말을 끼적거리며 생각했다. 그러다 고개를 드니 리에프가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커튼 틈을 파고들어 비추었다. 야쿠는 별 생각 없이 그 시선을 맞받아 주었다. 사실 점심을 많이 먹어 배도 부르고 멍한 상태였다.


국무회의에서 궁정마법사의 자리는 그저 형식상 대접하는 자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적어도 야쿠는 그렇게 생각했다. 국토방위는 총사령관이, 왕과 성의 경비는 근위대장이, 재정은 재무대신이. 나랏일의 중요 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책임지고 있었고 마법사들은 여기저기에 힘만 빌려주면 되었다. 학생들이나 가르치고 연구직에 앉아 있는 교수들이 한 자리 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니 야쿠에게 국무회의는 지루할 뿐이었다. 본래 맡은 일에 빈틈없는 성격이었지만 오늘은 자꾸만 정신도 산만해졌다. 이따 강의 나가야 되는데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하품을 참는 순간 상석에 앉아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던 켄마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마법사님의 의견은 어때?”

……?”


리에프는 웃었고 쿠로오는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켄마는 여전히 야쿠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이 빈틈없이 야쿠를 응시했다. 뭐 중요한 얘기 했나 보네. 진짜 내가 미쳤지. 야쿠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후쿠로다니 연합왕국과의 외교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조금 더 친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간단히 말하자면.”

……제 의견이 필요한가요?”


저 쪽에 앉은 외무대신이 헛기침을 했다. 쿠로오와 리에프의 진급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던 대신들 중 하나였다. 둘 다 그런 중직을 맡기엔 나이가 어리지 않냐는 그들의 말에 리에프는 외무대신의 등 뒤에서 야쿠에게 코를 찡긋해 보였었다. 꼰대들이에요. 입모양만 봐도 웃음이 터져 나와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애쓰던 게 지금까지 온 거였다.


네코마 왕국은 원로들과 젊은 세력 간의 균형이 알맞은 편이었다. 별나게도 원로들은 대체로 정권에 대한 집착이 없었고-짐 싸서 내려간 네코마타 전 총사령관만 봐도 그러했다-젊은 신하들은 원로들을 충분히 존중했다.


당연하지, 야쿠.”


그것은 양쪽 모두가 공통적으로 소년왕 코즈메 켄마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고양이 신의 축복을 받은 성지에 세워진 네코마 왕국에서, 그 신의 후손으로 알려진 왕족들은 황제의 절대 권력과는 조금 다르게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강제하지 않아도, 억압하지 않아도 네코마의 사람들은 운명에 이끌리듯 고양이 신의 후손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많은 것을 희생할 수 있을 만큼.


너 때문인걸.”


야쿠 역시 사랑해 마지않는 켄마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온 대신들의 시선이 어느새 야쿠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손바닥에 흐르는 땀을 망토 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왕의 입에서 나올 말은 그와는 합의된 적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켄마는 봐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왕을 지키려다 저주를 받았는데, 당연히 다함께 그걸 풀어 줄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


야쿠는 그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주라는 말을 입에 담다니. 배신감마저 비치는 야쿠의 표정을 보고도 켄마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후쿠로다니가 웬만해서는 부엉이 숲의 비밀을 알려줄 것 같지 않았거든. 그렇지만, 그쪽도 이제 귀족정의 시대는 갔으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켄마의 말에 야쿠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시선의 끝이 자리한 곳에는 리에프가 있었다. 그가 격려하듯 환히 웃자 이마를 덮은 은발이 차르르 흔들렸다. 시선을 돌리며 야쿠는 입술을 깨물었다.


보쿠토와 아카아시 공동왕 체제가 제대로 자리 잡았으니 해볼 만 하다고 판단한 거야. 꼭 대마법사님만을 위해서는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


쿠로오가 켄마의 말을 대신 마무리했다. 국무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야쿠님, 야쿠님.”


궁정도서관의 가장 깊은 곳, 웬만해서는 발길이 닿지 않는 그곳을 야쿠는 좋아했다. 먼지투성이 바닥을 대충 닦아내고 푹신한 방석을 갖다 놓고선 마법서를 읽으며 몇 시간이고 앉아있을 만큼. 학교에서의 강의를 마치고 궁으로 복귀한 그는 책장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던 참이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뜬 야쿠는 순간 아직도 국무회의 중인가 하는 착각을 했다. 갈라진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노을빛을 등진 소년의 얼굴이 그때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전하가 걱정하고 계세요.”

……걱정할 일을 벌이질 말았어야지.”


, 아니다. 야쿠는 잠이 덜 깨 무심코 뱉은 속마음을 후회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먼지 때문인지 눈이 뻑뻑하게 아파왔다.


저는 전하가 나서주셔서 기뻐요.”


리에프가 망토자락을 추스르는 야쿠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 

야쿠가 입을 열려는 순간 지평선 끝에 걸려 있던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밤은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불을 켜두지 않은 도서관이 어둠에 휩싸였다. 리에프는 순간 가려진 시야에 제 안에 웅크리고 있던 마음이 저를 충동질하는 것을 느꼈다. 몇 번을 고백하고 밀어붙여도 그러려니, 하고 자신을 쳐다보던 연상의 마법사님이었다.


야쿠는 그 어둠 속에서 제 입술에 닿아오는 말랑한 감촉에 물러나다 책장에 머리를 쿵 박았다. 놀라 움찔하는 어깨를 리에프가 부드럽게 붙들며 책장으로 그를 더 밀어붙였다. 매끈한 망토자락이 리에프의 손 안에서 구겨졌다. 어리고 철없이만 비추어졌을 제 모습은 어둠속에 완전히 감추어졌을 것이다. 야쿠님을 좋아해요. 언젠가의 수줍었던 고백을 떠올리며 리에프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 그리고 긴장했던 숨을 뱉으며 그가 막 야쿠의 입술 안쪽으로 더 깊이 파고들려는 순간이었다.


.


야쿠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반짝, 하고 도서관에 걸린 모든 양초에 불이 붙었다. 순식간에 빛이 들어오자 리에프가 눈을 찡그렸다. 야쿠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에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떼고 대신 이마를 마주 대며 야쿠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야쿠님은 늘 아무 말도 안 하시죠. 저주에 대해서도, 제 마음에 대해서도. 그래서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기로 했어요. 제 방식대로요.”


야쿠가 손바닥으로 가볍게 리에프의 뺨을 때렸다. 리에프는 말없이 뺨을 맞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야쿠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안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야쿠는 리에프의 손을 무시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참이었다. 구겨진 망토 자락을 정리하던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떨리는 시선이 리에프의 담담한 얼굴로 향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알아요.”

헛소리하지 마. 애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몸을 틀어 그를 지나치려는 야쿠의 등 뒤에서 리에프가 조용히 말을 끊었다.


안다면요? 부엉이 숲에 있는 그것이 야쿠님에게서 뭘 가져갔는지 제가 안다면요.”


야쿠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려다 책장에 등을 부딪혔다. 그럴 리 없어. 중얼대며 휘청거리는 그의 허리를 리에프가 감싸 당겼다.


네가어떻게.”


켄마가 말한 거야? 야쿠의 목소리는 꺼져가는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쿠로오에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던 켄마였으니 그럴 리 없다고 믿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리에프가 알 방법은 없었다. 야쿠가 알기로는.


전하가 그러실 리가요. 오히려 제가 말씀드렸어요. 다 알고 있다고요. 후쿠로다니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안전하게 부엉이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해줄 길잡이가 있어야하기 때문일 뿐이에요.”

…….”

야쿠님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저예요.”


그가 또렷하게 말했다. 야쿠는 리에프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리에프가 먼저 손을 떼고 물러섰다.


대신 저도 원하는 게 있어요.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매번 거절당하는 게 속상해서요. 마음이 서시면 절 찾아와 주세요.”


리에프는 언제나 야쿠가 그랬던 것처럼 망설임 없이 그의 앞에서 등을 돌렸다. 검은 갑옷의 어깨에 금장으로 장식된 검은 망토 자락이 야쿠의 눈앞에서 휘날렸다. 리에프가 떠난 자리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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