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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HQ!!

[리에야쿠] Enchanted 01








아침이 오는 게 싫다.

늦잠을 자지 못하는 거의 평생의 습관대로, 창 밖에 희끄무레한 여명이 밝아오면 눈을 뜬다. 그리고 그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제일 먼저 변함없는 내 손을 확인한다. 허리를 일으켜 앉으면 보이는 침대 맞은편의 거울에 변함없는 내 얼굴이 비친다. 여전히 십 년 전 그대로이다.

손톱만한 정의감과 충성심에 너무도 쉽게 불타올랐던, 어린 왕자를 껴안았던 그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대답은 아니.

나는 그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그런 선택을 했던 나 자신을 원망하고 저주한다. 멈추어 버린 내 시간과 그로 인해 어떤 방향으로도 성장하지 못하는 내가 미워 견딜 수 없다. 제발, 날이 밝아도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루를 정리하고 침대에 들어 눈을 감은 채로, 그렇게 이 고통스러운 삶이 간단히 끝나 버렸으면.

그러나 나는 한 줄기 희망을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기에, 오늘도 밝아오는 아침을 마주한다.

 

 





마법에 걸린 사랑,

Enchanted 01

 

 


 



소년왕 코즈메 켄마의 왕실근위대 부대장이었던 하이바 리에프가 근위대장에 올랐다는 소식으로 네코마 왕궁이 떠들썩했다. 그의 검 실력을 문제 삼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의 나이와 경력을 따져봤을 때, 역시 파격적인 인사였다. 굳이 따지자면 이미 부대장이었으니 대장이 되는 게 당연한 순서이기는 했다. 애초에 부대장으로의 진급 역시 유래 없이 빨랐었고. 왕궁의 참새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역시 집안이지. 아직 열아홉에, 별의별 사고를 다 치고 다니는 왈가닥인데 가문이 아니면 무얼 믿고 왕의 신변을 맡기겠냐는 거였다.


그리고, 궁에서 유일하게 조용했던 왕의 식당에서는 아침부터 들이닥친 누군가가 테이블을 쾅 치며 이 인사 결정에 반대하고 있었다.


아직 열아홉에,”

벌써 열아홉이지.”

진중한 면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데,”

검을 다룰 때를 제외하고는.”

전하는 대체 뭘 믿고!”


야쿠. 찻잔 너머로 검정색과 금발이 섞인 독특한 머리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 오지 그래. 작은 목소리가 끝없이 넓은 식당에 조용히 울려퍼졌다. 야쿠 모리스케는 흥분했던 숨을 한차례 고르고, 긴 식탁의 끝에서 자신을 부르는 왕에게로 다가섰다. 금실로 마법사의 상징이 새겨진 긴 푸른색 망토가 바닥에 살짝 끌렸다. 소년의 눈짓에 시녀가 그의 옆자리를 야쿠에게 빼주고 식당에서 물러갔다.


켄마 전하, 제가 오면서 들은 것만 해도,”

누가 네 앞에서 무슨 말을 했어?”


네 귀에 들리게 무슨 말을 했냐고. 감히. 코즈메 켄마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야쿠는 더 말하지 못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쿠로오가 은퇴라도 한대요? 어떻게 나한테도 말없이.”

은퇴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네코마타 영감님이야.”


그러다 다르게 따질 방법이 생각나 다시 입을 연 참이었다. 그런데 대답한 사람은 그의 앞에 앉은 소년왕이 아니었다. 지금 막 문 앞에 등장한 사람을 보고 켄마가 피식하는 동안, 야쿠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쿠로오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미간이 한층 더 찡그려졌다.


그럼 총사령관이.”

오늘부터 그게 나. 그러니까, 내 빈자리는 부대장이었던 리에프가 채우는 거고. 내일 국무회의 때까진 아직 비밀. 이해됐지?”


쿠로오가 빙글빙글 웃으며 걸어와 야쿠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검은 제복의 허리춤에 걸린 검이 철그렁하는 소리를 냈다. , 이거 완전 혼자 바보 된 기분이네. 야쿠가 착잡한 마음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마주친 친우에게 대충 안부를 물었다.


언제 돌아왔어? 쿠로오.”

어젯밤에. 켄마, 나 빵 먹는다.”


식탁에 올라온 빵을 집어먹는 쿠로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켄마는 야쿠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야쿠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전하가 걱정되니까 그렇죠.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애니까요.”

야쿠, 지금 여기 우리밖에 없는데.”


. 켄마가 지적한 건 전혀 다른 얘기였다. 제 속이 걱정으로 썩어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저 평온한 얼굴 좀 봐. 야쿠의 한숨이 길어졌다. 그는 체념하고 대답했다.


난 이미 충분히 예의 없게 굴었는데 뭐. 반말이 대수야?”

미안해. 사실은, 어제 네코마타 총사령관이 편지 한 통만 남기고 시골로 떠나 버렸거든. 다 늙은 할아버지가 은퇴 좀 하겠다는데 잡아 오기도 그렇잖아. 그래서 미리 말 못했어.”

전하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야쿠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포도주를 따르던 쿠로오가 킥킥 웃었다.


야쿠, 우리 중에 어린애 없어.”

…….”

켄마도, 리에프도 다 한사람 몫을 해 낸다고.”


야쿠는 거기까지 듣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켄마에게 목례만 하고 등을 돌려 멀어지자 그 뒤에서 켄마가 쿠로오에게 얼굴을 찡그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쿠로오도 빈 잔을 내려놓고 야쿠를 따라 식당을 벗어났다.

 




 

저기요, 야쿠님! 궁정대마법사님!”


놀리듯 부르는 소리에 야쿠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의 앞으로 쿠로오가 다가서며 허리를 숙여 야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국경에서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 피곤해 죽겠다. , 그렇게 입으니까 정말 대마법사님처럼 보이네.”

고맙다.”


야쿠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한숨을 쉰 쿠로오는 허리를 쭉 펴고 일어섰다.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는 야쿠의 앞에서 그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지나가던 시종들이 발걸음을 죽이고 눈치를 보다 하나 둘씩 사라졌다.


놀리는 거 아니었어. 그리고, 남 걱정할 시간에 네 일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아?”

거 봐, 비꼬는 거 맞잖아.”


. 쿠로오는 야쿠를 불러 놓고 한참동안 숨을 가다듬었다. 시종들이 전부 도망쳐버린 홀에는 그들뿐이었다. 저번 달에 마지막으로 싸웠을 땐 방 하나가 완전히 부서졌었지자제하자. 그가 망토가 둘러진 야쿠의 어깨를 애써 차분하게 붙잡았다.


네 걱정이나 하라는 말, 진심이야. 그리고 나한테 그만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더 좋고. 우린 친구니까.”

난 말 안한 거 없어. 그리고누가 너랑 날 친구로 보겠어?”

이 궁에서 우리가 친구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야쿠가 대답하지 않고 쿠로오를 뿌리쳤다. 그를 지나치는 등 뒤에서 결국 쿠로오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래! 누가 너랑 나를 친구로 보겠냐!”

……내가 이 꼴이라서 미안하게 됐다.”


그 말을 들은 쿠로오는 가 버리지 못하게 붙들고 있던 야쿠의 망토 자락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불편한 상황에서는 꼭 나오는 버릇이었다.


죽기 전에 들을 순 있는 거냐? 켄마는, 그래, 켄마는 절대로 말 안 하겠지. 걔는 괜찮으니까, 그리고 네 일이니까. 그렇지만 너는그렇게 됐는데!”


오랜 친구인 야쿠와 대화하는 게 이렇게 힘들어질 줄은 몰랐다. 자신이 꼭 알아야만 하는 비밀을, 혼자서만 품고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그를 보며 쿠로오는 착잡함에 휩싸였다. 게다가 더는 성장하지 않고 있으면서, 자신의 문제만을 신경 써도 모자랄 시간에 남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야쿠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는 열여섯 살 이후로 신체의 성장이 멈춘 상태였다. 키도, 얼굴도 몸도 전부. 내막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그 나이에 이미 대마법사에 필적할 만큼의 마력이 폭주해버렸던 탓이라고 수군거리곤 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일이라고.


그래, 네가 정 그렇다면, 머리 좀 식히고 다시 얘기해. 나도 인수인계다 뭐다 해서 바쁘니까. 이 소리도 십 년 째지만.”


쿠로오가 아는 것도 많지는 않았다. 십 년 전 켄마와 야쿠가 함께 부엉이 숲에 들어갔다가 무슨 일을 겪었던 건지. 왜 켄마의 머리색이 얼룩덜룩하게 변해 버렸는지, 그보다 야쿠가 왜 그 후로 성장하지 못하게 되었는지. 켄마는 야쿠에게 자신이 진 빚이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야쿠는 십 년 동안 그 날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힘든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넘기려 해도 쿠로오는 차오르는 답답함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우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아내어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도 아무 수확이 없었다. 해결된 것도 없이 한바탕 하고 나자 마음만 갑갑해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졌다. 그는 야쿠의 곁을 지나쳐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야쿠가 작게 비꼬았다.


잘 가, 대장님.”

앞으로는 국군 총사령관입니다.”

거 참 잘되셨네요.”

부디 우리 마법사님이 새 근위대장을 잘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조금 걱정되기는 해도, 그만한 인물이 없으니까요.”


둘 다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 쥐새끼 하나 남지 않은 복도에 일촉즉발의 순간이 지나갔다. 일류 검사다운 가볍고 빠른 발걸음으로 쿠로오가 사라지자 야쿠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 역시 가슴이 갑갑해 가장 가까운 창문으로 다가가 유리를 세차게 열어젖혔다.


.”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야쿠님!”


이미 늦었네. 야쿠는 망토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창에서 물러섰다. 창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훈련장이었다. 쿠로오와 같은 검은 제복을 입은 키 큰 소년이 검을 휘두르다 말고 신나게 야쿠를 부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야쿠님! 혹시 소식 들으셨어요? ,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는 온 궁전 사람들이 다 듣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쿠로오가 떠나고 하나 둘씩 돌아온 시종들이 얼굴을 돌리고 쿡쿡 웃었다. 야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파란 옷자락을 휘날리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 자리를 벗어나는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


그러다 그만 끝없이 긴 본궁 계단의 끝에서 망토자락을 밟고 휘청댔다. 볼썽사납게 넘어지게 생겼네. 야쿠는 눈을 꾹 감고 아주 짧은 시간동안 마법을 써야할지 고민했다. 그게 더 창피할 것 같은데. 그냥 넘어지고 말지 뭐.


야쿠님!”


그러나 넘어지려는 그의 팔을 큰 손이 휘어잡았다. 야쿠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익숙한 목소리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눈을 떴다. 시야에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제가 간다니까요?”

리에프.”

혹시저 싫어서 또 도망가시던 길이었어요?”


아아니, 그런 게 아닌데. 야쿠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켄마의 앞에서 못미더워했던 것과 다르게 야쿠는 이 열아홉 짜리 어린애에게 자주 휘둘렸다. 도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지금도 순식간에 울상을 짓는 그 앞에서 야쿠는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언제 도망쳤다고 그래. 궁에서 시끄럽게 소리 지르지 말랬잖아.”

자꾸 까먹어서요. 근데 진짜 서운하거든요? 저는 야쿠님이 저 축하해 주려고 뛰어오시는 줄 알았는데!”


또 리에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야쿠는 그냥 체념하고 리에프를 올려다보았다. 쿠로오보다도 더 큰 키에, 저 덩치. 확실히 어린애로는 보이지 않는 외모긴 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제 앞에서 입을 삐죽이는 걸 보고 있노라면 미덥지 못한 마음부터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켄마와 쿠로오는 대체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그렇지. 야쿠는 리에프의 손을 가볍게 떼어냈다. 그리고 품에서 마법사의 완드를 꺼냈다. 리에프가 겁먹은 눈을 했다.


그걸로 뭐 하시려고요……. 또 때리시게요?”

, 근위대장이 아무나 하는 건 줄 알아? 당장 훈련하러 가.”

저는 지금부터 출근해서 전하 곁을 지켜야 되는데요.”


. 그렇지

야쿠는 자꾸만 열다섯에 궁에 처음 들어온 리에프의 모습이 아직 눈앞에 남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제 앞에 있는 건 멀뚱히 서서 저를 내려다보는, 거의 다 큰 소년이었다. 야쿠가 혼란스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완드로 리에프의 한쪽 팔을 팍, 쳤다. 지팡이 끝에서 불꽃이 반짝 튀었다. 리에프가 우는 소리를 했다.


, 진짜 무섭다고요!”

네가 그렇게 징징거리니까 내가 널 믿고 보낼 수가 없는 거야.”

…….”


입술을 삐죽이던 리에프가 그의 말을 듣고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그대로 지나치려던 야쿠의 팔이 다시 한 번 그에게 붙들렸다.


그래도 믿으셔야 할 걸요.”

,”

이제 전하를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사람은 저니까. 그리고.”


야쿠가 뿌리치려 해도 손에 들어간 힘은 쉽사리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저도 애는 아니니까요. 모르시는 것 같지만.”


말을 마친 리에프가 천천히 팔을 놓아 주었지만 야쿠는 잠시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와 시선을 맞추는 리에프의 눈빛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진중한 면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데,’

검을 다룰 때를 제외하고는.’


갑자기 조금 전 제가 켄마에게 따지던 게 생각났다. 소년왕의 대답도.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지만 야쿠는 리에프가 대련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켄마와 쿠로오가 단번에 결정을 내리게 만든 무언가가 처음으로 야쿠의 눈에 보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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