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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HQ!!

[리에야쿠] Give Love 9





Give Love

하이바 리에프 X 야쿠 모리스케



w.비누꽃







리에프는 핸드폰을 붙잡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방 침대였다.


야쿠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그러자고 한 건 자신이었음에도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다친 데가 잘 낫고 있는지, 공부에는 잘 집중하고 있는지, 그리고내 생각을 하고 있을지. 이기적이고 모순투성이라 비웃어도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처음으로 저에게 매달려 오는 야쿠에게 그렇게 말하며 거절한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끝을 바란 적은 없었으니까. 야쿠에게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 그 시간이 흐른 뒤 과연 와줄지. 예전이었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겠지만 지금 리에프는 야쿠가 결국엔 스스로의 의지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완전히 정리한 뒤 자신에게 올 것이라 믿고 있었다. 문제는 그 과정이었다.


과정이라면 리에프도 겪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던 야쿠를 버려야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따라다니고 의지했던 강하고 단단한 보호자 같았던 그 모습을 완전히 잊어야 했다. 예전과 같을 거라 생각해 서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성장하며 서로 달라졌음을 둘 다 모르고 있었던 거다.


리에프는 이제 그 과거를 떨치고 싶었다. 그가 더 이상 야쿠의 옷자락을 붙든 동생이 아니라는 걸, 좋아하고 사랑하다 못해 야쿠보다 어쩌면 더 자라 버렸다는 걸 놓치고 있었다. 야쿠가 놀랍도록 몸을 웅크리고 앞을 보길 거부하는 동안에. 리에프는 야쿠와 앞을 보고 발을 맞추어 걷고 싶었다. 손을 잡고, 어깨에 팔을 두르기도 하고, 옆을 둘러보기도 하고, 웃고 떠들기도 하면서. 그러니 부디 이 기다림과 변화의 과정이 너무 길지 않기를 바랐다.

 




테이블에 엎드린 야쿠를 힘을 합쳐 대충 한 명의 등에 업히며 친구들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걔한테 연락 절대 하지 마하며 제법 얼굴을 무섭게 찡그리고 말하는 통에 리에프를 부르지도 못했다. 쟤네가 싸우고 왜 우리가 뒤처리를 해야 되냐. 불만스러운 눈길이 몇 번 오갔다.


야쿠는 정말 마음잡아야 했다. 리에프와의 문제뿐만 아니라 입시가 정말 코앞이었다. 더운 여름은 어느새 물러가고, 날이 선선해지고 있었다. 한 번 더 계절이 바뀌면 입시를 치러야 한다. 쟤가 저렇게 정신 못 차리는 애는 아니었는데, 하며 친구들은 한 번씩 혀를 차곤 했다. 그래도 적극적으로 뜯어말리지는 않았다. 알아서 하겠지, , ‘가 알아서 챙기겠지. 지금이야 싸운 것 같지만. 그들에게도 야쿠 옆의 리에프의 존재는 당연했다. 오래 보지 않았어도 느껴지는 관계였다. 누군가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였고 아마 지금 삐걱거리는 건 흔한 과정에 불과할 것이라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야쿠는 혼자 비틀거리며 현관에서 신발을 벗었다.


.”


술 냄새 섞인 한숨이 싸늘한 빈 집의 공기를 갈랐다. 야쿠는 발끝에 걸려 잘 벗겨지지 않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발을 털어내 벗어던지고 마룻바닥에 대충 드러누웠다. 조금 감각이 무뎌진 손으로 바지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괜히 액정을 켜본다. 아무 연락도 없었다.


몇 번 참았더라.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은 넘었겠지. 대충 계산을 마친 야쿠는 술기운을 빌려 발갛게 차오르는 자신감에 기대 익숙한 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왔다.


-여보세요.


머뭇거리지도, 다급하지도 않은, 생각보다 더 평이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 야쿠는 울컥할 뻔 했다. 이건 다 지금 마시고 들어온 맥주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야쿠는 어느새 용기가 모조리 달아나 굳어 버린 입술을 어렵게 떼었다.


나야.”


한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알아.


리에프는 대화를 도와주지 않았다.


지냈어?”

-…….


전화 너머로 얕은 한숨이 들려와 야쿠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리에프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 숨을 고르고 있었다.


-술 마셨지.

…….”


이번에 말을 잇지 못한 쪽은 야쿠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 할 일 많을 텐데 그만 자.

리에프! 잠깐만……! ……, 지금 집에 혼자야. 할 일 많은 것도 맞고, 중요한 시기인 것도 아는데. 나 우리가 왜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그냥. 지금 와주면 안 돼?”


야쿠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무릎을 끌어안고 벽에 기대앉았다. 그냥 지금 와주었으면 했다. 그냥 제가 다 미안하다고 말할 테니까,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했다. 그것뿐이었다.


-……,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내 마음이내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게그렇게 쉬워 보였어? 너한테는?

리에프.”

-넌 하나도 주지 않으면서, 나보고 네가 원할 땐 언제든 가서 만족할 때까지 계속 내놓으라는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나 주고 싶어도 어떻게 줘야 할지 모르겠어. 너한테 이제 다 주고 싶은데! 너처럼 주는 법을 모르겠어.”


둘의 목소리가 함께 높아졌다. 리에프는 격앙돼 있었고, 야쿠는 절박했다.


-. 알았어.

알았다니?”

-계속 생각해. 제발, 어렵게 생각하지 마.

어떻게…….”

-사랑하는 거, 어려운 거 아니야. 하지만 스스로 알았으면 좋겠어.

…….”

-이제 넌 내 형 아니잖아. 모리스케.


이름이 불리자 가슴이 뛰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 말만 남기고 리에프는 전화를 끊었지만 야쿠는 오랫동안 핸드폰에 귀를 댄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가슴이 진정되고 나자 금세 부끄러움에 귀가 달아올랐다.


넌 하나도 주지 않으면서.’


하나도 주지 않았던 거, 인정한다. 그래도 야쿠는 이제는 주고 싶었다.


이제 넌 내 형 아니잖아.’


이제는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리에프에게 매달렸던 건데.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야쿠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머리를 헤집었다. 그리고 날이 밝고, 기계적으로 학교에 나가 교실에 앉아 있고, 다시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모든 순간 동안 리에프가 했던 말에 대해 고민했다.


주고 싶다. 형이고 싶지 않다. 사랑그거 하고 싶다. 리에프와.


하지만 시간을 갖고 무언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면,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겠지

야쿠는 제 생각의 모순을 문득 깨달았다. 더는 리에프 앞에서 강한 척 할 수 없다. 좋은 형으로 있고 싶지도 않다. 예전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옛날과는 다르게 사랑하고 싶다. 그러니 사랑을 주고 사랑을 기쁘게 받고, 사랑을 시작하려면 옛날로 돌아가서는 안 됐다. 놓고 온 저의 좋은 모습들이 아쉬워도 모른 척 돌아서야 했다. 돌아보지 말고 걸어가야 했고, 그렇게 성숙해져야 했다. 야쿠는 다급하게 바지 뒷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해 라이터 불빛은 허무하게 찰칵이고 사그라졌다. 그래도 방금 생겨 난 마음 속 불씨는 사라지지 않고 크기를 키워 나갔다.


마침내, 리에프가 말한 대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로 야쿠와 리에프가 만나는 날은 극히 적었다. 야쿠를 잊지 않고 챙기는 리에프의 어머니가 싸 준 반찬들을 리에프가 야쿠에게 가져다주러 오는 날, 혹은 야쿠가 리에프네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는 날 뿐이었다. 야쿠는 민망한 마음에 최대한 그런 상황들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절에도 한계가 있었고, 어른들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들 앞에서 리에프는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담담하게 야쿠를 대했고, 야쿠도 그대로 따라 했다. 사실 감정을 숨기는 건 원래 야쿠가 더 잘 했다. 그리 버겁지 않은 나날들이 지나갔다. 야쿠는 가끔씩 이 시간들이 아까웠으나 리에프 모르게 자신의 마음을 가꿔나갈 때면 왠지 모를 즐거움이 솟아나기도 했다. 어서 예쁘게 완성시켜서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을 늘 예쁘게 쓸고 닦았던 리에프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일상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야쿠가 대학입시를 치러 가던 날, 그는 집 앞 길모퉁이에서 리에프와 마주쳤다. 정확히는 리에프가 야쿠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리에프는 교복 위에 긴 코트를 입고 두꺼운 목도리를 두르고 서 있었다.


시험 잘 봐.”


그는 별다른 인사 없이 곧바로 준비한 말을 꺼내며 야쿠에게 부적을 건넸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야쿠의 시선이 잠시 발치로 떨어졌다.


……리에프.”

?”


둘 다 말이 느렸다.


시간이조금 더 필요해.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더 줘. 나는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아.”


리에프는 잠시 뒤 그래, 하고 대답했다.


조금 놀라긴 했다. 리에프는 오랜만에 야쿠를 만나러 집을 나서며 오늘 시험이 끝나면 그때부터 다시 관계가 시작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은근한 기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야쿠의 얼굴이 너무나 걱정 없이 맑아 보여서, 리에프는 거기서 마음을 놓기로 했다.


이거, 도시락이야. 분명히 안 챙길 것 같다고, 엄마가 갖다 주래.”

……. 어떻게 아셨지.”


맞장구는 쳤어도 야쿠는 분명 리에프가 엄마에게 먼저 부탁해 도시락을 가져왔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시락을 받아 들자 따끈한 온기가 전해져 온다. 야쿠는 푸스스 웃었다.


농담이야. 시간은 오늘 밤 까지, 어때?”

?”

준비 됐어?”


리에프는 말없이 목도리를 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온기가 남은 그것을 야쿠의 텅 빈 목에 둘둘 감아 주었다. 야쿠는 오랜만에 다가온 리에프의 손길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떨어졌다 만나니 분명 익숙한데도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리에프는 별다른 거절 없이 목을 내맡긴 야쿠를 내려다보며 그가 모르게 살짝 손을 떨었다. 익숙하고, 여전한 설렘. 그렇지만 마음속에 차오르는 새로운 기대.

 




좀 걸을래?”


리에프의 제안에 야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프는 가로등이 켜진 한산한 골목을 걸으며 몰래 야쿠를 곁눈질했다. 교복을 갈아입었는데도 아침에 제가 매 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 아래로, 패딩 소매 밑으로 삐죽 나온 맨 손이 보였다. 장갑도 끼워 주고 싶은데. 리에프는 많은 것들을 하고 싶었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아직 아니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시린 겨울 날씨에 한적하고 을씨년스럽게 변한 동네 공원이었다. 사람이 하나도 없는 그 곳에서 둘은 가장 안쪽까지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 야쿠가 먼저 발걸음을 멈췄다.


이제 그만 걷자.”

뭐 따뜻한 거 마실래?”

난 됐어. ?”

추워 보이는데. 나도 됐어.”


그러면서 리에프는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해 보이고 더 구석진 곳으로 뛰어갔다. 발길이 닿지 않는 화단 안쪽, 꽃덤불의 뒤로 돌아간 리에프는 왠 꽃다발을 그 안에서 꺼내 들고 나왔다. 야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시험 끝난 거 축하해.”

이건…….”

여기까지 같이 오게 되면 주려고 숨겨 놨어.”


. 이해했다는 듯 작게 내뱉은 야쿠는 곧 품에 가득 차는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오렌지색의 장미, 노란색의 프리지아,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


고마워, 진짜.”


입 밖으로 말하기는 창피했지만 야쿠는 리에프가 자신을 떠올리며 이 꽃을 골랐다는 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캄캄한 밤인데도 조금 달아오른 얼굴이 민망해 야쿠는 얼른 말을 꺼냈다.


나도 줄 거 있었는데. 너한테 받은 거에 비하면 진짜 별 거 아니라, 지금 좀 창피하네.”

뭔데?”


기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는 리에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야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리에프가 아침에 준 것과 같은 부적이었다.


나도 어제 신사 갔다 왔거든.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공부도 어차피 안 되길래. 나 잘 되게 해달라고 빌면서 네 것도 같이 빌었어.”

고마워…….”

뭐 빌었는지안 물어봐?”


야쿠는 미소를 지었다. 리에프는 확연히 이전과는 달라진 그 모습에 잠시 말을 잊었다. 어릴 때와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 때처럼 단단하고, 또 부드럽고, 자신을 휘어잡는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그가 망설이는 사이 야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몸의 작은 움직임에도 야쿠의 품에 안긴 꽃다발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공중에 은은한 향기를 뿌렸다.


걸어오면서 둘 다 느끼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어색함에 말도 몇 마디 하지 못했지만, 우연히라도 스치고 싶어서, 어떻게든 닿고 싶어서 몸을 가까이 붙이고 팔을 흔들며 걸어왔다. 그런 건 서로 고백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함께 있어서 설레는 기분. 공원까지 걸어오며 리에프는 꽃을 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뭐라고 빌었는데?”


그러나 야쿠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리에프가 짧게 생각하는 동안, 야쿠는 할 말을 정리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입을 열자마자 제일 먼저 터져 나온 건 그동안 참았던 감정이 만든 눈물이었다.


야쿠는 처음으로 리에프의 앞에서 흐느껴 울었다.


그 전에, 할 말이 있어.”

너 울어?”

나 알게 됐어. 내가 절대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거아무리 나아지고 좋아져도 절대로 예전의 내가 될 수는 없어."

모리스케, 그건."

끝까지 들어 줘, 지금 아니면 또 말 못하고 도망칠 것 같아서 그래! , 그래서 먼저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너에게 믿음직한 형이었던 그 모습을 다시 보여주지는 못할 것 같아. 그것 때문에, 그게 부끄러워서, 그동안 리에프 네 마음을 모른 척했어. 제대로 마주해 주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대했던 거 진심으로 미안해.”


리에프는 야쿠의 울음 섞인 고백 앞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야쿠를 껴안고 싶은 듯 자신도 모르게 양 팔을 어정쩡하게 들어 올린 채로.


그동안 나도 극복하고 싶었어. 근데 난 잘못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그동안 겪었던 일들, 그것 때문에 받았던 상처, 느꼈던 감정들절대로 그것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는 걸 몰랐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몰랐어


야쿠는 양 손바닥으로 얼굴에 잔뜩 흐른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 하는 울음이 들리자 리에프는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야쿠에게 건넸다. 야쿠는 그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코를 푼 뒤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그런 모습까지 전부 나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야. 분명 나는 지금보다 멀쩡했던 옛날의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그게 슬픈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만그걸 전부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 나를 만들어 가는 게……. 그게 나아지는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됐어.”

…….”

내 자기연민그 꼴 보기 싫었던 모습으로 너한테 상처 줬던 거 미안해. , 나보다 어른이었어. 네가 하는 말들, 그냥 뭘 모르는 어린 동생이 하는 위로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어. 지난 몇 달 동안 너랑 떨어져 있으면서 알게 됐어. 그리고네 말대로 시간이 필요했어. 그때서야 알았어.”


야쿠는 몇 달 동안 차분히 정리했던 마음을 밖으로 꺼내 놓았다. 한 번 입을 열자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배열된 말들이 줄지어 밖으로 나왔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편 리에프는 여전히 심각하게 찡그린 얼굴로 야쿠의 어깨를 붙들었다.


네가 그렇게 미안해할 만큼 잘못한 거 없어! 그런 거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어딨어? , 난 그냥 모리스케가 좋아서, 그래서 같이 알고 싶었던 거야!”

……너밖에 없어. 이렇게 나도 모르는 나를 계속 궁금해 하고, 찾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그리고 네가 그렇게 단호하게 끊어 줬던 덕분에 생각할 용기도 낼 수 있었어.”

그런 말 하니까 미안해지잖아그날 양호실에서도, 그 다음에도, 나 너한테 엄청 어른인 척 했는데. 그래도, 나도 그냥 나밖에 모르고, 그냥 네가 좋아서내 마음만 자꾸 강요하고 그랬던 거 미안해.”


야쿠의 사과가 익숙하지 않은 듯 리에프는 횡설수설하며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멋지게 하고 싶어 준비했던 고백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리에프는 쏟아지는 야쿠의 감정을 홀로 받으며 어쩔 줄 모르고 그 안으로 빨려들었다. 갑자기 제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예를 들면 예전에 마냥 어리게 굴었던 일들과 같은 기억이 떠올라 입꼬리가 시무룩하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야쿠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서 멈추면 리에프처럼 아무 말이나 해버릴 것 같아서.


오늘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건, 너까지 내 우울함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널 의지하고 싶어졌지만, 그래도 너에게 마냥 기대서, 우는 소리만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어. 그래서 생각보다 더 길었나보다.”


그 말을 듣고 리에프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던 손을 문득 멈추고 야쿠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또 어디 가?”


야쿠는 이 순간 리에프가 아무리 컸어도 역시 좀 눈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게 웃겨서 콧물을 훌쩍이는 와중에도 큭 웃었다. 아니, 사실은 리에프가 희망적인 쪽으로는 생각도 못 하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한 번 더 반성하며 야쿠는 마지막으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조금은 놀래 주고 싶은 마음도 섞여 있었다.


좋아해. 리에프, 좋아해.”


예상대로 멀뚱히 굳어서 아무 말 하지 못하는 리에프를 바라보며 야쿠는 참지 못하고 크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그만 그 얼굴에 마음이 아파 또 울컥, 눈물이 터졌다.


……. , 너랑 같이 행복해지고 싶어졌어.”

모리스케

좋아한다고. 믿어도 돼.”


가까스로 숨을 고르며 노력한 끝에 야쿠는 울음을 섞지 않고 제법 또렷하게 리에프에게 고백할 수 있었다. 이번에 얼굴이 일그러진 쪽은 리에프였다.

야쿠가 놀랄 새도 없이 리에프는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팔로 얼굴을 감싸 무릎에 묻어 버리고 야쿠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리에프.”


리에프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것만으로도 야쿠는 리에프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야쿠는 속상한 마음에 그 앞에 허리를 숙여 리에프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려 했다. 그제야 리에프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흐윽, ……. 야쿠에게 일으켜 세워지면서도 리에프는 어린애처럼 팔로 눈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또 울어?”


마음이 아팠지만 야쿠는 최대한 어릴 때 리에프를 달래주던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려 애쓰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게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곧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어린애처럼 지지부진하게 군 건 야쿠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리에프가 예전처럼 다시 울어도 달래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는 리에프를 달래는 법, 야쿠는 제일 확실한 것 한 가지를 알고 있었다. 야쿠는 조심스레 얼굴을 가린 리에프의 팔을 떼어냈다.


나 좀 보


그러나 리에프는 얼굴이 드러나자마자 야쿠에게 성큼 다가와 어깨를 세게 끌어안았다. . 야쿠는 리에프에게 끌어안긴 채 잠시 놀라서 서 있었다. 그러다 곧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리에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 후로 잠시 동안 어깨를 움츠리고 울던 리에프는 콧물을 훌쩍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닦아 주는 야쿠의 손등에 리에프의 눈물이 묻어났다. 리에프는 그새 빨개지고 부은 눈으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곧 야쿠의 얼굴로 옮겨졌다가 입술로 내려왔다. 야쿠는 그 눈을 보고, 아까 하지 못한 것을 하기 위해 리에프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리에프의 입술에 닿는 순간 야쿠는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네가 평생 내게 지금 같은 사랑을 주게 해 달라고 빌었어.’


, 되게 이기적이지.

장난처럼 웃으며 꺼내고 싶었던 말은 새로운 설렘을 알리는 입맞춤 앞에 녹아 사라져갔다. 야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너에게 주고 싶다고,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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