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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HQ!!

[리에야쿠] Give Love 08







Give Love

하이바 리에프 X 야쿠 모리스케




w.비누꽃








야쿠는 그 날 이후로 며칠 동안 리에프를 만나지 못했다. 만나야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버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눈을 떴을 때 리에프는 없었고 야쿠는 어느 틈에 머리 밑에 푹신하게 받쳐져 있던 베개와 잘 덮인 이불에서 리에프가 다녀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코를 파묻고 있으면 리에프의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새삼스레 자각한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편안해서 몰랐던 것. 야쿠는 시큰거리는 눈가를 얼른 이불자락으로 꾹꾹 눌러 닦았다.


일어나 둘러본 리에프의 방은 몇 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책상 앞의 벽에 잔뜩 붙어있는 야쿠와 찍은 사진들, 그게 몇 장 더 늘어난 것을 빼면 거의 그대로였다. 카메라를 향해 찍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젓고 있거나 웃으며 셀카를 찍는 리에프의 옆에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얼굴. 하얀 색의 마카로 사진 위에 하트를 그려 놓은 리에프의 마음과 너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게 미안해서, 야쿠는 한참 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리에프 역시 그 날의 일이 미안해서, 그리고 말을 꺼내면 정말 야쿠와 끝나 버릴까 무서워서 야쿠를 피하는 중이었다. 화가 났기도 했고, 상처도 받았지만 그래도 리에프는 자신의 감정을 단호하게 맺거나 끊지 못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놈이구나, 하는 생각에 가만히 있다가도 피식 피식 쓴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멍하니 야쿠의 생각에 빠져드는 일이 잦아졌다. 하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했다.


, 하이바. 저기 그 선배 간다.”

……어어.”

뭐야, 안 가봐? 설마 아직도 아는 척 안 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었다. 리에프는 오히려 야쿠가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기둥 옆으로 바짝 붙으며 한숨을 쉬었다.


몸은괜찮을까.

미운데, 너무 밉고 화나는데 그래도 네가 아프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모리스케. 우리…… 정말 이렇게 끝인 걸까?

 



야쿠는 일주일 동안 단 한 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했다. 교과서와 노트에는 온통 의미 없이 샤프로 찍은 자국들만이 가득했다.


마지막에울었었지. 내가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제가 잘못 생각해서 상처를 줬으니 야쿠는 사과하고 싶었다. 미안해, 하고 메시지를 수없이 찍었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내용은 자꾸만 길어졌다. 더 이상 오해하게 만들기 싫어서였다.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말에 그렇게 가슴 아플 줄은 몰랐다.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슬픈 말로 들릴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사랑한다는 말이 꼭 마지막 인사 같아서……. 야쿠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책상 서랍에 깊숙이 밀어 넣은 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지만 야쿠는 그냥 예의 그 골목길에 서서 친구들과 담배를 피웠다. 며칠 새 눈에 띄게 상한 그의 얼굴을 보고, 친구들은 평소처럼 장난을 거는 말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야쿠를 빼놓고서 각자 여자친구와 어떻게 키스하고 또 뭘 했는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옆에서 멍하니 흘려들으며 야쿠는 리에프와 잤던 밤을 떠올렸다. 시작부터 괜찮을 거라 생각했었고, 예상대로 거부감 같은 것도 없었다. 서툴렀고 너무 아팠고 그래서 별로 좋지도 않았는데 그럼에도 리에프의 손이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사랑해 죽겠다는 듯이 만지고 다급하게 키스하고 부딪쳐 왔을 때, 분명 야쿠는 리에프를 마주 껴안고 달뜬 숨을 내뱉었었다


동생이었다면, 진짜 리에프를 동생으로 생각했더라면 그렇게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 시작했더라도 분명 거부감을 느꼈겠지. 슬프고, 미안하고, 무섭고, 그렇게 여러 감정이 뒤엉켰고 절망적이었어도 야쿠는 그 순간 자신을 안았던 리에프가 좋았다. 분명히좋았다.


좋아해.’


야쿠는 조심스레 한 마디를 속삭여 보았다.

생각을 입 밖으로 내면 그건 곧바로 사실이 된다. 야쿠는 순식간에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그 감정이 너무 벅차서, 한참 동안이나 무릎에 고개를 묻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자꾸만 몸이 떨렸다.

리에프가 보고 싶었다.

 






근 삼 년 동안 최악인 중간고사 성적을 대충 변명하고서 상담실을 나서는 야쿠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담임의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안전하게 도쿄에 있는 대학에 가려면 이렇게 성적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야쿠는 지난주에는 수행평가를 내는 것도 잊었다. 그래서 담임에게 복도에서 깨지고 있는 걸, 리에프의 친구들 중 한 명이 분명한 일학년 남학생이 멈춰 서서 한참을 지켜보다가 갔다. 곧바로 리에프의 귀로 들어갔겠지, 한심하게. 야쿠는 터벅터벅 교실로 돌아와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챙겼다. 내일은 체육복을 입고 등교해야 했다. 축제 이틀 전, 체육대회였다. 야쿠는 리에프와 혹시 한 마디는 해 볼 수 있을까 기대했다.


쟤 진짜 잘 뛴다!”

야쿠, 네 친구 아냐? 저번에 도서실에서. 걔 맞지?”

…….”


한 차례 축구 시합이 끝나고 육상 경기가 시작되었다. 운동장에서는 일학년의 계주가 한창이었다. 리에프는 어릴 때부터 거의 대부분의 운동을 잘했으니 당연히 출전했을 것이다. 야쿠는 23각 경기를 앞둔 삼학년들과 운동장 한 쪽에서 리에프의 달리기를 구경했다. 리에프는 그 경기에 나간 누구보다도 키가 크고, 다리가 길고, 눈빛이 반짝반짝했다. 일 등으로 들어와 반 친구들과 차례차례 하이파이브를 하며 땀을 닦는 그 얼굴을 야쿠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빛나고, 좋아 보였다. 그늘진 외로움 같은 건 한 자락도 없이. 그게 좋은데 싫었다. 처음으로, 리에프가 다른 사람들과 저 없이 웃는 게 싫었다.

 

야쿠!”

선생님, 야쿠 다쳤어요!”


23각 달리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던 야쿠는 골인점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곳에서 발을 헛디뎌 심하게 넘어졌다. 야쿠가 중심을 잃은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달리려고 한 짝꿍 때문에 땅에 질질 끌린 무릎이 잔뜩 쓸리고 벗겨져 있었다. 야쿠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간신히 짚고 일어났다. 주변에 반 아이들이 잔뜩 몰려 서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 미안. 골인도 못하고…….”

무슨 소리야! 너 엄청 피나잖아!”


아프고 민망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는데 걱정하는 말이 돌아왔다. 야쿠는 순간 울컥, 올라오려는 울음을 애써 눌렀다. 그러는 사이 반장이 달려와 야쿠를 부축했다.


…….”


분명 이런 꼴 보이기 싫다고 생각했었는데. 반장과 야쿠가 걸어 나온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조금 전 계주를 마친 일학년들이 쪼르르 앉아 있었다. 야쿠의 무릎에서 줄줄 흐르는 피를 보고 여학생들은 작은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리에프와 눈이 마주친 야쿠는, 그 와중에도 저의 아픈 모습을 보고 리에프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가 궁금했다. 관심 가져주길 바라고 있었다.


리에프의 주변에 앉은 익숙한 얼굴의 친구들이 놀란 표정으로 야쿠와 리에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리에프 역시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곧 야쿠에게로 달려올 것처럼. 그러나 리에프는 곧 멍하니 자리에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야쿠에게서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

야쿠, 괜찮아? 못 걷겠어?”

아니.”

, 울어? 어떡하냐, 그렇게 아파?”


반장의 당황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도 야쿠에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야쿠는 운동장을 빠져나가며 반장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할 만큼 눈물을 뚝뚝 흘렸다.


평소 같았으면 리에프는 야쿠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달려와 난리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아마 직접 업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겠지. 울었을지도 모른다. 아프지 말라고, 다친 곳을 붙들고 또 애처럼 굴었겠지. 야쿠는 속상했다. 그렇게 한 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가 없어서, 당황한 반장이 떠난 뒤에도 야쿠는 양호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쓰고 훌쩍훌쩍 울었다. 그러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숨을 죽이고 어깨만 들썩였다. 전에는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은 모습이었고, 지금은 리에프가 봐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모습이었다. 야쿠는 이런 자신이 못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너무 서러웠다. 깨진 무릎이 아픈 것을 핑계 삼아 야쿠는 베개가 축축해지도록 흐느꼈다.


……괜찮아?”


들썩이던 어깨가 굳은 듯 멈추었다. 리에프가 어느새 등 뒤에 와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듯, 들려오는 목소리가 꽤 가까웠다.


병원안 가도 돼?”

…….”


야쿠는 조용히 콧물을 훌쩍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괜찮아.”


말이 딱딱하게 나왔다. 전혀 리에프를 원망할 처지가 못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야쿠는 그를 탓하고 싶었다. 사실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했으면서 막상 리에프를 보게 되자 등을 돌릴 용기를 내는 게 힘들었다. 야쿠는 숨을 죽이고 언제 몸을 일으켜야 할지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어 보았다. 그렇지만 눈물범벅이 되어 있을 얼굴이 또 걸렸다.


요즘, 힘들어 보였어. 잘 보지는 못했지만. 모리스케, 혹시 나 때문이야?”


조심스럽게 꺼낸 말 안에는 야쿠를 향한 걱정, 두려움, 그리고 혹시 모르는 기대까지 담겨 있었다. 이 말로 내 마음이 닿았을까. 리에프는 이불 속에 파묻힌 작은 등을 바라보며 흐르는 정적이 무서웠다.


……. 너 때문이야. , 공부도 못 했고 성적도 떨어졌어. 그리고 오늘은 무릎도 다 깨졌네. 네 생각 하다가 그랬어.”


야쿠는 꽉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에프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진짜야? 하고 물어왔다. 그리고 야쿠가 누운 방향으로 침대를 빙 돌아 다가오더니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야쿠의 다리 쪽 이불을 조심스럽게 걷었다.


다친 데 좀 볼게.”

마음이 너무 이상해.”


야쿠는 말에 울음이 섞이지 않도록 애써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었다.


이 마음이 너무 무서워. 너를 보면 내가 너무 이상해져.”


리에프는 야쿠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일어난 채로 야쿠는 리에프의 앞에 고개를 떨구고 시선을 피했다. 막상 오랜만에 눈을 마주하려니 민망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였다. 리에프는 양말만 신은 야쿠의 발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로 가져다 놓으며 그의 얼굴을 살짝 살폈다.


그 말, 내가 어떻게 이해하면 돼?”


그러고서 리에프는 야쿠의 상처를 살피며 속상한 얼굴이 되었다. 리에프가 크게 티를 내지 않아도 야쿠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이, 이렇게 리에프의 얼굴이 누그러진 지금이, 해야 하는 말과 하고 싶은 말을 차례대로 할 때인 것 같았다.


미안했어. 그 날.”

모리스케.”

내가 잘못 생각해서너한테 상처를 줘서, 미안해.”

잘못한 건 나야. 아프게 해서 미안했어.”


리에프가 입술을 살짝 깨무는 걸 알아채고 야쿠는 좀 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야쿠의 기대와는 다른 말이 이어졌다.


난 있잖아. 너를 좋아해서 한 번도 무섭고 거부감 든 적 없었어. 어쩌면 모리스케는, 나를 좋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억지로 네 마음에게 강요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내가 널 몰아붙여서, 그래서 그렇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해.”

……리에프.”

지금껏 네가 나보다 더 어른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네가 그렇게 약하다는 걸 안 지 얼마 안 돼서. 근데 나도 애새끼잖아. 그래도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조금 횡설수설하며 여기까지 말하고 리에프는 고개를 푹 숙였다. 후회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움직여주지 않는다 해도 그렇게까지 무를 줄은 몰랐다. 리에프는 그 날 야쿠가 평소와 다르게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 야쿠와 관계를 맺었다. 늘 좋아했던 마음을, 밀려나기만 했던 마음을 어떻게든 보상 받고 싶어서. 그가 미워서, 그렇게 한 번만 상처 줘 보고 싶어서. 그 상처를 그대로 돌려받았어도 리에프는 야쿠의 앞에서 미안했다. 그리고 이 상태로는 어떤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시간이 필요해, 모리스케.”

, 싫지 않았어! , 그날 정말로,”

정말 그랬어도, 시간이 필요해. 너랑 나 둘 다.”


쥐어짠 듯한 리에프의 목소리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야쿠에게 이렇게 어른스럽게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야쿠는 그때까지 리에프의 무릎에 올라가 있던 자신의 다친 다리를 치워내고 몸을 똑바로 해 앉았다. 리에프의 옆으로 몸을 기울였지만 리에프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항상 네가 날 사랑해주길 바랐는데. 매일 쫓아다녔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고 싶진 않았어.”

리에프, 저기,”

너랑 절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 진짜 행복하게…….”


순간 리에프는 평소처럼 울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꽉 다문 입매가 살짝 경련했다. 리에프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생각보다 밝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아프지 마.”


리에프는 그 말을 하며 야쿠를 끌어당겨 가볍게 껴안았다. 그 상태로, 꽤 한참이라고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숨을 고르는 듯 리에프의 가슴이 들썩이는 게 야쿠의 뺨에 느껴졌다. 야쿠는 땀에 젖어 축축한 리에프의 체육복 등을 꽉 붙잡았다.


공부 열심히 해, 하며 리에프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맨날 네가 하던 말인데. 우는 대신 살짝 웃음을 섞은 짧은 인사를 마치고 리에프는 곧바로 돌아섰다. 등을 돌리고 선 채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뒤를 보지 않고 곧바로 침대 커튼을 헤치고 양호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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