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리에야쿠 교류회 원고
MIRAGE
하이바 리에프 X 야쿠 모리스케
w. 비누꽃
형은 성격이 밝고 착했고, 동생은 공부를 아주 잘 했다. 누구도 그들을 친형제라 믿지 않았지만 분명 그들은 형제였다. 그 증거로 형은 동생을 아주 끔찍이 챙기고 돌보았고 동생은 꼭 성공해 호강시켜 주겠다고 몇 번이고 형을 끌어안고 맹세하곤 했다. 그들이 사는 낡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연립주택 앞을 지날 때면 동네의 꼬마들은 부모의 옷자락을 붙들고 물었다. ‘왜 저 집엔 형하고 동생 둘만 살아?’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그래. 착한 형들이니까 너 혹시라도 놀리지 마라.’ ‘근데 왜 둘이 성이 달라?’ 부모는 그저 아이를 붙들고 그 집 앞을 빠르게 벗어날 뿐이었다.
형의 이름은 야쿠 모리스케, 동생의 이름은 하이바 리에프. 그러나 이렇게 성이 다른 것까지 따지지 않아도 그들은 겉보기만으로 분명 남남이었다. 리에프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진하게 서양의 피가 섞인 혼혈아였다. 그의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과 햇빛을 받으면 녹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사람들은 아이의 친부모가 누구였을지 속닥거리곤 했다. 반면 야쿠는 작은 몸집에 누가 봐도 이 땅과 어울리는 새침한 동양의 외모를 가진 아이였다. 크고 동그란 눈은 귀여웠고 선해 보였다. 둘의 외모 차이는 결국 동생 때문에 두드러지곤 했다.
리에프가 아이들의 놀림에 일일이 상처받던 어린 시절에는 항상 야쿠가 나타나 리에프를 감쌌다. 두 살 위의 형이면서도 그의 동생보다 작았지만 야쿠는 다부진 얼굴로 동네 꼬마들을 호되게 혼내 쫓아버리는 법을 아는 아이였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장신의 동생이 자그마한 형의 어깨를 감싸며 날선 눈초리를 보내는 것 하나만으로 누구도 그 형제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둘은 그렇게 단둘이 의지하며 동네의 제일 구석지고, 제일 허름한 집에서 악착스럽게 살아갔다.
-형, 나….
동생이 형을 형이라고 부를 때는 무언가 미안한 이야기를 꺼낼 때였다. 그러나 야쿠는 리에프가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 날은 리에프가 수석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이기도 했다. 형은 동생이 눈치 보는 게 싫어 대책도 없으면서 고개부터 끄덕였다.
-가, 의대. 한 번 열심히 공부해 봐.
-하지만….
-학원비는 내가 마련할 테니까.
현 내에서도 알아주는 수재였던 리에프는 큰 꿈을 꾸었다. 더, 더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에 진학하면 과외 아르바이트만으로도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진지한 계산도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꿈 아니냐는 생각을 자꾸만 들이미는 그 현실이라는 것에서 어떻게든 도망쳐 보려는 마음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리에프는 무엇보다 이 바닥에서 그저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는 어른이 되는 것으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둘만 남겨진 뒤 수없이 다짐했던 것처럼 보란 듯이 성공해 형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지지리 가난하고 미래도 없는데 늘 웃고 있는 야쿠를 보며 리에프는 이를 악물고 공부해왔던 것이다. 흔하고 흔한, 없는 집에 태어난 똑똑한 아이가 갖는 그런 꿈. 리에프는 자신이 그 성공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야쿠 역시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이 가진 것은 밝은 성격과 좀처럼 울지 않는 악바리 같은 근성뿐이었다. 가난해도 늘 웃었고 나라에서 주는 적은 수당과 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돈 안 되는 아르바이트로 받은 푼돈이 생활비의 전부였어도 리에프가 늘 말끔한 모습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악착같이 살았다. 피도 섞이지 않은 동생, 버리고 떠나면 그만일지도 몰랐지만 야쿠는 하늘 아래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이렇게 동생을 위해 희생하며 사는 자신에게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것이라도 붙들지 않으면 맥이 탁 풀려 모든 의욕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긍정적이고 세심하게 자신의 마음을 분석하는 머리는 없었지만 야쿠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채 의식을 가진 사랑하는 동생은 반드시, 자신의 몫까지 성공할 것 같았다. 리에프보다 세상의 쓴맛을 일찍, 그리고 훨씬 더 많이 경험한 그로서는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들이 용이 되는 이야기 따위는 이미 동심의 영역으로나 치부될 정도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리에프의 확신에 찬 눈동자나 각종 경시대회에서 받아온 상장 같은 것들이, 그러니까 누구도 부모도 없고 돈도 없는 집 애들이라고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어 준 뛰어난 성적과 범상치 않은 외모가 야쿠의 마음속에 답지 않은 한 자락 희망이 불어오게 만들어 버렸다.
지역의 가난하지만 우수한 인재에게 주는 도움의 손길들. 그것만으로는 의대에 진학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과외는 못하더라도 유명 학원에 보내야 했다. 물론 고등학교 삼 년 내내. 리에프는 어떻게 학원비를 마련할 거냐고 묻는 대신 야쿠를 뒤에서 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야쿠는 리에프를 밀어내지 않았다.
-모리스케, 내가….
-너는 아무 걱정 말고,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야쿠가 문득 멈춰선 순간을 놓치지 않고 리에프는 야쿠를 안은 그대로 바닥에 깔아 놓은 이불 위로 넘어졌다.
-하, 하지 마.
-왜 안 돼?
야쿠의 등 위에 엎드린 채 리에프는 티셔츠의 목덜미를 쭉 잡아당겨 야쿠의 목과 어깨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맨 살냄새가 좋았다. 리에프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야쿠의 귀를 간질임과 동시에 야쿠는 엉덩이에 닿아오는 무언가를 느끼고 몸을 비틀었다.
리에프가 이런 방향의 호기심을 야쿠에게 감추지 않고 보여 온 것도 이미 꽤 오래 된 일이었다. 사실 야쿠는 이것을 호기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스스로 정의라도 해서 눈앞에 뻔히 보이는 리에프의 사심을 감추어야만 서로를 의지하는 형제라는 애틋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자랐지만 친형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오로지 둘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던 아이들은 자라면서 본래 가지고 있던 형제애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런 감정에는 경계선이 없었고, 리에프와 야쿠 둘 중 누구도 확실하게 단정 짓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사실 아직 그럴 여유를 부릴 형편은 못 되었다. 분명한 것은 리에프 쪽이 더 본능을 따랐으며, 야쿠는 오랫동안 동생을 책임져 온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리에프의 눈빛을 마주하고, 몸집도 키도 손도 훨씬 더 큰 그에게 짓눌린 채 이런저런 애정을 요구하고 욕정을 부딪치는 행위를 당할 때면 야쿠에게는 가슴 쓰린 쾌감이 찾아왔고, 점점 더 리에프의 행동을 모른 척 받아주게 되어버리곤 했다.
-키스하면 안 돼?
-절대 안 돼.
-그럼 비비게 해 줘.
-…….
한 번도 입을 맞춘 적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이 경계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뛰어 넘어 버리는 행위임을 알았다. 이미 나올 대답을 알고 있던 리에프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야쿠에게 바싹 몸을 붙여왔다. 뒷목에 뜨거운 입술과 혀가 닿고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리에프가 자신의 엉덩이 사이를 불뚝 선 제 것으로 깊이, 느리게 또 빠르게 문지르는 동안, 야쿠는 자신도 같은 숨소리를 내뱉고 있음을 깨닫고 이불을 입 안 가득 깨물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는 돈 생각밖에 없었다.
*
야쿠가 리에프와 학원 앞까지 같이 걸어온 날이 있었다. 끌어 모은 비상금과 아르바이트 비 가불로 어찌어찌 한 달은 등록할 수 있었다. 리에프가 손을 흔들며 학원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고, 야쿠는 고민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발끝을 내려다보며 몸을 돌렸다. 그 때 학원 건물 옆 으슥한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가 야쿠를 불러 세웠다.
-너, 저 애 형이지? 나 이 학원 원장인데.
-아, 안녕하세요!
-잠깐 이리 와 봐. 어째 형이 더 동생 같네. 귀엽게 생겼다, 야.
원장이라는 말에 야쿠는 다급히 달려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가까이 다가온 야쿠를 그 남자는 이리저리 뜯어보며 여러 가지를 물었다. 학교에서도 유명한 형제였기 때문에 분명 학원가에도 학생들의 입을 통해 말이 돌았을 것이었다. 원장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어가며 야쿠의 볼을 꼬집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야쿠는 그의 행동이 그리 좋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어른이 아이에게 갖는 관심이란 원래 이런 것이리라 생각했다. 남자는 그 얼굴을 관찰하며 야쿠가 그가 꺼낸 동생 이야기에 머뭇거리고 잘 거절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어렵지 않게 그를 바로 옆에 세워진 자신의 차에까지 태울 수 있었다.
야쿠는 가까스로 차 문을 열고 구르듯 빠져나와 아직 밝은 대로변을 미친 듯이 달렸다. 정신없이 집에 들어와 신발을 다 벗지도 못한 채로 현관 문턱에 엎드리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떨리는 손 안에 지폐 여러 장이 쥐어져 있음을 알았다. 도망치려는 그의 주먹 안에 어디 가서 말조심하라며 원장이 억지로 구겨 넣은 돈이었다. 야쿠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심하게 구역질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를 향해 그 남자가 내뱉던 더러운 말들을 어쩔 수 없이 떠올렸다. ‘너, 나랑 가끔 여기서 만나자. 네 동생 학원비는 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면서 원장은 크고 두꺼운 손으로 밖에서와는 달리 노골적으로 야쿠의 목덜미와 팔을 주무르고 매만졌다. ‘너, 돈이라는 게 더러운 거 알지. 근데 그 더러운 놈을 생각보다 쉽게 벌 수 있다? 좋은 거 가르쳐 주는 거야, 선생님이.’ 담배에 찌든 냄새가 풍기는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원장은 야쿠의 허벅지로 손을 뻗었다. 파들파들 떨며 눈만 굴리고 있던 야쿠는 턱턱 막히는 숨을 몇 번이나 들이쉬고 나서야 그의 손을 밀어내고 집에 가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려는 와중에도 노련하고 비열한 어른은 지갑을 꺼내 입을 막으려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야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닦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깊이 파묻으며 야쿠는 또 돈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돈이라는 더러운 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말, 그리고 그 방법. 그건 야쿠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날도, 야쿠는 이젠 인사치레처럼 같이 놀자고 한 번 권해 보는 친구들을 거절하고 마트에 들렀다가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두부 한 모, 감자 한 봉지를 사는 것도 몇 번을 빙빙 돌며 고민하다가 봉투를 들고 나서는 발걸음은 언제나처럼 아쉬웠다. 다른 고등학생들은 온갖 영양제에 귀한 보양식에 몸에 좋다는 것들은 다 먹고 공부에만 힘을 쏟는다는데, 그들은 밥 한 끼 차려 먹는 것에도 벌벌 떨어야 했다. 야쿠는 리에프가 공부만 하라는 자신의 말에도 방학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마뜩찮았다. 거기다 학원 등록일도 다가오고 있었다. 좁고 어두운 부엌에 비닐봉지를 내려놓으며 야쿠는 충동적으로 컴퓨터 전원을 켰다. 처음에는 분명히, 그저 얼마나 받는지 궁금해서였다.
야쿠는 교복이 아닌 후드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시내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나온 것도 그저 궁금해서이냐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폴더식 핸드폰의 액정에 등록되지 않은 번호로 온 문자가 떴다. 자신을 찾는 물음에 지금 입고 있는 옷의 색깔을 대충 묘사해 답장을 보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야쿠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곧 야쿠의 뒤에서 나타난 남자는 야쿠가 망설이거나 뿌리칠 틈도 없이 그를 끌고 어두운 골목을 지나 사라졌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내가? 아니야. 중간고사 준비 잘 돼가?
-응. 모의고사도 일 등 했어. 실망시키지 않을게.
-바보야, 그런 말 하지 마. 얼른 자.
리에프는 야쿠의 이불 위로 구르듯 다가와 야쿠를 꽉 끌어안았다. 입술이 이마를 아슬아슬하게 훑는 것을 느끼며 야쿠는 그냥 눈을 꽉 감았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아까 있었던 일들이 자꾸만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고, 입 안은 계속 까끌까끌했다.
그럼에도 야쿠에게 불쾌감과 동시에 비정상적인 안도감을 불러온 것은 두 번째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자괴감, 그런 감정은 사치였다. 야쿠는 가방 속에 들어 있는 현금을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은 부족하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두 탕씩 뛰고,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수 있겠네,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야쿠는 리에프의 품 안에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라는 감정이 우스워서였다.
시간이 짧으면 돈도 적었다. 야쿠는 그 점이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저녁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그 일을 하는 것으로 스케줄이 바뀌었다. 싸구려 모텔의 침대에서 울라고 강요하면 울었고, 바짝 선 것을 물라고 하면 물었다.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 엉덩이가 흔들리는 와중에 야쿠는 머릿속으로 돈을 세며 참았다. 죽도록 아프고 힘들고, 역겹고, 아무리 참아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순간들도 있었다. 그런 날은 리에프에게 들키지 않게 머리를 감지 않고 샤워하며 혼자 욕을 뱉기도 했다.
새벽이 다 되어 들어오면 아무리 숨을 죽이고 종종걸음을 쳐도 리에프는 잠에 취한 와중에 야쿠를 찾아 부둥켜안고 누웠고, 야쿠는 그 품 안에서 짧게 휴식했다. 그런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
여전히 리에프는 일 등을 차지했고, 야쿠는 몸을 팔았다. 리에프는 야쿠에게 대체 어떻게 그 돈을 벌어 오는 거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지만 야쿠는 새벽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되었다고 대충 둘러댔다. 그러면서 사실은 원래 하던 아르바이트를 다 관두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길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보던 여자가 데려간 업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말도 입 안으로 삼켰다. 술을 마시게 되었다는 것도. 그래도 취업반이었으니 얼마 안 남았으리라 여겼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구직에 성공하면 곧바로 발을 뺄 생각이었다. 점점 더 큰 액수의 돈을 만지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달콤했지만, 그래도, 야쿠는 리에프가 의대에 입학할 때 그에게는 얼룩이 한 방울도 튀지 않은 영광만이 있기를 바랐다. 그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거기까지의 과정이 어떠했건 간에 리에프의 입학식에서는 떳떳하게 웃을 수 있기를.
-왜 그렇게 봐?
-그냥. 너는 잘 생겨서, 연예인을 해도 될 거 같은데.
-그건 너무 운에 달렸잖아.
리에프는 그 말을 하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연예인이 되는 것은 운이 따르지만, 자신이 성공한 의사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 확신에 찬 모습이 야쿠를 안심시켰다. 바닥에 앉아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본 리에프는 설거지를 하느라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어 싱크대에 걸친 뒤 곧바로 야쿠의 앞에 주저앉았다.
-오늘은 네가 어디까지 날 봐줄까.
야쿠의 가슴이 덜컹했다. 주말 오전의 햇살은 언제나 나른했지만 형제가 사는 집은 늘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두웠다. 리에프는 그 가려진 빛을 무기로 야쿠에게 달려들었다. 몇 번이고 묻고 싶었다. 정말 괜찮은 거냐고, 내가 정말 네가 주는 대로 받기만 하고 있어도 괜찮은 거냐고. 그러나 결국 리에프는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야쿠가 힘들다고 울고 무너지면, 자신의 꿈을 결국 접어야 할까봐. 아니면 학원도 다니지 못하고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힘들게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실패할까봐. 리에프는 어쨌든 결과가 좋으면 중간의 아픔들은 잊힐 것이라 믿었다. 그런 자위라도 해야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지금 나를 믿고 조금만 희생해 주면 반드시 갚겠노라고, 그 말을 리에프는 매일 밤 야쿠를 끌어안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분명 야쿠도 그리 생각하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아…….
야쿠가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가 거침없이 벗겨졌다. 이런 식의 진행은 처음이라 야쿠는 당황해 리에프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미 가슴에 입술을 묻고 있던 리에프는 눈만 들어 야쿠를 올려다보았다. 얕게 한 줄기 들어오던 햇살에 리에프의 눈동자가 초록빛으로 반짝였다. 그 눈을 보며 야쿠는 숨을 삼켰다. 대책 없이 펼쳐진 모래사막에 발이 푹푹 빠지는 것 같다가도 그 눈을 들여다보면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마음이 시원해졌다. 야쿠의 희망이자, 구원이 되어 줄 리에프의 눈. 야쿠는 그 색을 담으며 눈을 감았다.
-눈 떠.
오래지 않아 다시 눈을 떠야 했지만. 리에프는 붉어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입고 있던 청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부끄러움이라곤 조금도 없이, 들뜨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리에프는 야쿠의 눈을 빈틈없이 응시해 왔다. 그러면서 오른손으로는 빳빳하게 선 자신의 것을 빠르게 주물렀다. 그 아래 눕혀진 채로 야쿠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다급하게 생각했다. 제법 능숙한 손길로, 아니면 입으로 대신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바지를 벗고 엉덩이를 벌려 보일 수 있을지도. 그러나 할 수 있어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법이었다. 야쿠는 가만히 있는 편을 택했다.
-나, 넣고 싶어.
-…….
-네 안에 넣고 싶다고, 모리스케.
대답을 종용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야쿠가 말이 없자 리에프는 얼굴을 찡그리며 입술을 맞대려 했다. 야쿠는 재빠르게 얼굴을 돌려 피했다.
-빨리… 끝내고 옷 입어, 리에프.
리에프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다물어졌다. 아까부터 리에프의 양 볼도 야쿠의 것처럼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말없이 야쿠의 허리를 들어 바지를 벗겨냈다. 당황해 몸을 벌떡 일으키려는 야쿠를 가볍게 밀어 다시 눕히며 그럼 그냥 보게 해줘, 하고 무덤덤하게 들릴 정도로 감정을 숨기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오히려 야쿠는 더 부끄러워졌다. 리에프의 손이 어느새 그렇게 크게 자랐다는 것을 야쿠는 그 날 처음 알았다. 목소리와는 다르게 감정을 숨기지 못한 손으로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어루만지는 리에프 때문에, 야쿠는 한동안 열에 시달려야 했다.
*
사고란 그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불행이라는 걸 야쿠는 그 날 알게 되었다. 평생을 잊지 못할, 아주 극적이고 뼈저린 방식으로.
해가 바뀌었지만 야쿠는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다. 사실은 그럭저럭 괜찮은 자리가 있어도 가지 않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수당도 없이, 그의 한 달 월급만으로는 학원비와 생활비를 대기가 너무나 빠듯했다. 야쿠는 더 큰 액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가진 몸뚱이 하나만으로 이런 돈을 만질 기회가 그의 평생에 있을까 싶었다. 부자들에겐 그마저도 아주 하찮은 액수였을 돈이지만, 야쿠는 조금 더 욕심을 내게 되었다. 업소에서 일을 계속한다면 지금 당장 필요한 비용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뜰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이었다. 이 동네에 가까스로 박힌 돌처럼, 평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야쿠에게 그림자로 얼룩졌어도 이만큼이나 희망찬 생각이 찾아온 것은. 그래도 잠시만 더 참자는 생각은 여전했다. 리에프는 여전히 야쿠의 구원이고 희망이었다.
그 날은 야쿠에게는 이렇게 재수 없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재수 없는 날이었다. 돈, 그 더럽고 간절한 것을 얼마를 줘도 거절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밑바닥의 취급을 받았다. 남자는 잘 세워지지도 않는 자신의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야쿠에게 온갖 행위를 하도록 시켰고, 끝내는 주먹까지 휘둘렀다. 방에서 들리는 소리를 더 외면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똘마니를 보낸 여자가 달래듯 얹어준 돈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야쿠는 어두운 밤거리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러면서 멍들고 터진 얼굴을 리에프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걸려온 전화를 받고 사무적인 말투의 간호사에게 짧은 설명을 듣는 동안, 야쿠는 자신이 오늘 겪은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 이 애의 손이….
-예민한 작업을 하는 게 아니면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충분히 안정을 취하시고, 삼 일 후에 다시 오세요.
-아니요, 선생님. 얘는 손을 써야하는데요, 선생님…….
리에프의 오른쪽 손바닥이 깊게 찢어졌다. 방학이 되자마자 야쿠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다 생긴 사고라고 했다. 야쿠의 목소리가 이렇게 덜덜 떨리는 것은 리에프도 살면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리에프는 이 모든 게 남의 일인 듯 담담히 다치지 않은 왼손으로 야쿠의 손을 움켜잡았다.
-안녕히 계세요.
평소 같았으면 야쿠의 몫이었을 인사까지 정중히 건네고 그는 형을 잡아끌고 병원을 나섰다. 야쿠의 시선은 붕대가 감긴 리에프의 오른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형은 동생에게 손을 붙들린 채로 그들의 옹색한 보금자리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을 멍하니 걸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는 창문 앞에 하염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희뿌옇게 날이 밝아왔다.
-아프지.
물어본 것은 야쿠가 아니었다. 리에프는 조용히 야쿠의 옆에 다가앉아 천천히 손을 뻗어 야쿠의 얼룩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피멍이 든 볼과 찢어져 피딱지가 앉은 입술 위로 여러 갈래의 눈물길이 나 있었다. 리에프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얼굴로 야쿠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만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커튼을 쳐놓지 않은 창 안으로 새벽빛이 비쳐들었다.
-리에프, 너…….
-나, 네가 그 돈 어떻게 벌었는지 알아.
리에프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야쿠는 믿을 수가 없어 리에프의 얼굴을 움켜쥔 채 몇 번이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빛나던 꿈이 사라진 그 눈동자에는 더 이상 초록빛이 비치지 않았다.
-리에프, 괜찮아. 다른 과 가서, 더 성공할 수 있어. 너는 잘할 수 있어.
리에프는 야쿠가 자신이 무어라 하는지도 모르고 더듬더듬 애써 뱉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몸을 일으켜 야쿠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미리 깔아둔 이불에 형을 눕히고 큰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덮어 가려 주었다. 야쿠는 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깊은 잠 속으로 도망쳤다. 그러면서 꿈결에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리에프는 없었다.
*
야쿠는 창문 밖으로 새 봄이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히 올 것이라 상상했던 미래가 이루어졌다면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대 입학식에서 리에프에게 꽃다발을 안겨 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에프가 갑작스레 그의 곁을 떠났던 날부터, 야쿠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간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볼 것 없는 집안을 깨끗이 쓸고 닦으며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 혼자 뒹굴며 웃는 날도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지만 야쿠는 받지 않았다. 이미 예전부터 자신이 다니던 밤거리에 도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워낙 눈에 띄어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외모를 가진 젊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 야쿠는 진실을 아는 것과 그것을 믿는 건 별개인 것처럼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처음 듣는 구둣발 소리가 그의 낡은 집 현관 앞에 멈추고, 열쇠가 끼긱거리며 현관문의 잠금장치에 돌아가는 익숙한 소리가 들릴 때까지.
리에프는 조용히 구두를 벗고 걸어 들어와 야쿠의 옆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그러다 야쿠가 무릎을 끌어당겨 얼굴을 파묻어 버렸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모리스케, 그거 알아?
야쿠는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절대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지만 리에프가 코트와 함께 손에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을 벗어 바닥에 놓는 소리에 그만 후다닥 얼굴을 내밀고 말았다. 그 때 다쳤던 손이 제대로 아물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야쿠는 오른쪽 손등부터 어느새 걷어붙인 셔츠 소매 밑으로 길게 이어진 검고 복잡한 문신을 보고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울음 같은 신음을 뱉어야 했다. 그 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말은 걱정이나 반가움의 인사가 아닌 명백한 안타까움이었다.
-너는 의사가 아니어도 성공할 수 있었는데, 대체 왜 그랬어.
-너 혼자 거기에 두고 싶지 않았어.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대답한 리에프는 휙 몸을 틀어 야쿠의 양 어깨를 붙들어 잡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길이 되레 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며 리에프는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모리스케, 그거 알아?
-뭘 말이야.
-누구도 다시는 너를 그렇게 아프게 하지 못해.
-…….
야쿠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그새 어린 티를 벗어버린 리에프의 얼굴을 마주했다.
-하지만 넌… 사람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려고…….
-단 한 번도 그런 마음으로 의사가 되겠다고 한 적 없어, 알잖아.
야쿠도 자신의 말이 모순임을 알았다. 형제는 단 한 번도 이타적인 마음으로 꿈꾼 적이 없었다. 리에프는 그런 헛소리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틀어 야쿠에게 입 맞추려 했다. 그러나 야쿠는 그 입술을 밀어내며 똑바로 리에프의 눈을 응시했다. 리에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 날 리에프는 혼자 봉합 수술을 받고 응급실의 침대에 누워 야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자신보다 열 배는 더 혼이 나간 얼굴로 응급실로 뛰어 들어오는 야쿠를 보며 리에프는 자신의 마음과 결심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 멍들고 깨진, 초라하고 야윈 얼굴이 바로 자신이 그 알량한 꿈이라는 것과 맞바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당연하고 진부한 깨달음, 그것 역시 불행한 사고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다.
리에프는 야쿠를 딛고 뛰어올라 성공에 안착하는 길을 버렸다. 리에프는 그런 식으로 만든 밝은 미래에도 야쿠에 대한 자신의 부채 의식을 평생 떨쳐 버릴 수는 없을 것임을 어느 날 깨달았다. 그렇다면 평생 야쿠와의 관계에 선을 만들고 그 선을 뛰어넘어 곁으로 갈 수 없으리란 것도 함께 알게 되었다. 그래서 리에프는 올라가는 대신 야쿠가 내려갔던 깊이보다 더 깊게 바닥으로 파내려갔다. 그곳에선 바닥으로 치달을수록 높이 올라갈 수 있었다. 리에프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스스로 손바닥을 찢고 밤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그들의 꿈에 작별을 고했고, 더 이상 야쿠가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 따위로 그가 짊어지지 않아도 될 고통을 애써 합리화하지 않길 바랐다.
-이제 키스해도 되지.
물음이 아니었다. 야쿠는 리에프의 말을 듣고 천천히 몸을 돌려 리에프를 똑바로 마주보고 앉았다. 그러다 야쿠가 리에프의 품으로 달려들어 차가운 바깥 공기가 가시지 않은 목에 팔을 두르는 것은 아주 짧은 찰나에 이루어졌다. 리에프가 다가가기 전에 야쿠가 먼저 그에게 입 맞추었다. 키스는 조용하고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의 확인 없이 욕구의 해소만 있었던 그 언젠가의 순간들을 뛰어넘기 위해 한데 엉켜 방바닥에 넘어졌다. 야쿠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옷을 정신없이 벗기는 리에프의 오른손이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보는지 눈치 챈 리에프는 웃으며 그 손을 들어 부러 더 노골적으로 야쿠의 벗은 몸을 쓸어내렸다. 그로 인해 찾아올 밑바닥의 천국 같은 쾌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 야쿠는 벗은 다리를 들어 리에프를 더 가까이 끌어당겨 안았다. 리에프는 자신의 아래에 누운 야쿠가 끌어당기는 대로 끌려가며 한 번도 야쿠를 만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야쿠는 한 번도 찌들고 구겨진 적 없는 것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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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theme song : 러브홀릭 - 신기루
ending theme song : a great big world - oa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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