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ve Love
하이바 리에프 X 야쿠 모리스케
w. 비누꽃
여섯살의 리에프는 초등학생이 된 나보다 이미 더 컸다. 나는 반에서 제일 작았고, 리에프는 또래 중에서 가장 크고도 남았다. 그러니 내가 그 애를 이것저것 챙기는 모양새는 아마 옆에서 보기에 좀 우스웠을 거다. 하지만 리에프는 분명 내가 붙어서 챙겨 줘야 하는 동생이었다. 함께 다니다 뭘 잃어버려도,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져도 리에프는 나만 바라보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어릴 때부터 내가 리에프가 따르는 형이라는 자부심에 우쭐해 있었다. 그래서 리에프가 점점 더 자라 많은 것들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는 게 서운했다. 처음에는 리에프도 내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듯 일부러 나에게 조르고 달라붙었다. 나는 그게 단 한 번도 귀찮고 싫지 않았다. 그냥 당연히 해 왔던 일이었고 그게 나와 그 애의 관계의 규칙이었다. 나를 붙잡고 따라다니는 리에프, 그리고 리에프를 의젓하게 챙기는 나.
그러나 중학생이 된 리에프가 내게 어린 동생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이 행동에서 티가 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내게 그 점을 선언하게 되었을 때...
나는 마침내 그 애가 귀찮아졌다.
야쿠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어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간밤에 찾아온 감정은 분명 충동적으로 시작되었지만 한 차례의 흔들림이 멎고 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속에 자리해 버렸다. 당연해서 귀찮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 리에프의 마음을 처음으로 의식하는 것. 야쿠는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당장 나가서 리에프를 마주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아니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게 될 지 예상할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어..."
아직 리에프가 오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거울을 보며 괜히 셔츠를 정돈하는데 핸드폰이 번쩍였다. 야쿠는 리에프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엄마'
야쿠는 잠시 멍하니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여보세요...?"
"어? 하이바!"
"야, 널 여기서 보네?"
"하이바 선배...!"
리에프는 축제 현장을 가로질러 야쿠네 집으로 오는 동안 계속해서 아는 얼굴들을 마주쳤다. 학교 친구들, 중학교 동창들, 자신에게 고백했던 중학교 후배까지. 계속 붙잡힌 덕분에 시간이 자꾸만 지체되어 리에프는 조금 초조해졌다. 그러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늘 자신감이 넘쳤지만 야쿠 앞에 설 때는 두 배, 세 배로 신경을 쓰게 된다. 전통 의상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무난한 카라티와 청바지를 골랐지만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걷는 리에프를 힐끔거리며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익숙한 시선을 받으며 리에프는 야쿠의 집 앞에 도착했다.
"모리스케!"
이름을 부르며 예의상 문을 탕탕 두드렸다. 설렘과 긴장이 뒤섞인데다 날씨까지 더워 리에프는 어느새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원래 차분한 머리가 이마에 더 달라붙는 게 싫어 리에프는 계속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잠깐 서서 기다리는데도 집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모리스케...?"
리에프는 잠시 망설이다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서며 리에프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야쿠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
열린 옷장과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부러진 옷과 물건들만이 방 안에 남아있었다.
삿포로의 여름은 도쿄보다 훨씬 서늘했다. 야쿠는 막 어머니의 수술 경과를 듣고 진찰실의 문을 닫고 나오는 길이었다.
가벼운 맹장 수술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아주 오랜만에 핸드폰에 뜬 엄마라는 이름 하나로, 야쿠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삿포로로 달려오고야 말았다. 야쿠는 그 와중에도 자신이 가방에 옷 여러 벌과 책들을 챙겨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자신도 모르게 방학 내내 어머니의 옆에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구나 싶었다.
"엄마."
"와 줘서 고마워, 아들."
길고 복잡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아도 사라지는 간극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가까이 있을 때 서로에게 상처밖에 주지 못했다. 가끔 용기를 내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야쿠는 그간의 외로움을 보상받는 느낌으로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병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오랜만에 마주하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뜨겁지 않은, 따스한 안정감이 온 몸으로 퍼졌다.
"아, 리에프는 잘 있지?"
한참을 앉아 있다가, 또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다 마침내 어머니의 입에서 리에프의 이름이 나왔을 때, 야쿠는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공항으로 급하게 향하면서 문자를 보냈던 것 같은데, 와이파이가 끊어지면서 잠깐 에러가 났는지 문자는 전송되지 않은 채였다. 게다가 핸드폰은 여전히 비행기 모드였다. 야쿠는 한숨을 쉬었다. 일이 잘못되려면 이렇게 잘못될 수도 있구나. 문득 바라본 창 밖은 이미 어두운 한밤중이었다. 야쿠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나왔다. 전화 신호가 가는 동안 야쿠는 자신이 긴장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
"리, 리에프."
전화를 받고도 말이 없는 리에프에게 야쿠는 말까지 더듬어 가며 사정을 설명했다. 너무 미안했다. 급한 일이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날이 날이었던 만큼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자 리에프는 작게 탄식했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얘기에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안 오는 거야?
"어?"
-거기서, 안 오냐구."
"갈, 갈거야."
그래, 알았어, 대답하는 리에프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야쿠는 잠시 입을 열었다 곧 다시 다물었다. 어느 것도 확실히 말해 줄 수 없는 마음 상태인 것도 미안했다.
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야쿠는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보름 만에 리에프를 보게 될 것이다. 삿포로의 이모 집에서 야쿠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했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이었지 리에프에 대한 마음이 아니었다. 사실은 리에프에 대한 생각은 정리할 것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옆에 있어 주는 사람,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 그게 야쿠가 아는 리에프의 전부였으니까.
'네 꼬라지 보니까 너는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거든?'
갑자기 야쿠는 언젠가 앨리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리에프가 곁에 없는 동안 그는 어떻게 되어 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차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리에프와 진짜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신 야쿠는 리에프와 완전히 모르는 사이가 되었을 때를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아도 하나의 답을 찾아냈다.
비행기 시간을 촉박하게 잡아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일요일 밤이었고, 다음 날 바로 개학을 맞아 학교에 나가야 했다. 야쿠는 삿포로에 도착했던 날 통화했던 이후로 리에프와 연락을 하지 못했다. 리에프 쪽에서도 연락이 없었고, 야쿠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런 거리를 두는 것도 하나의 필요한 과정이라고 여겼다. 이제 남은 것은 타이밍이었다.
"저기, 리에프 좀 불러 줄래?"
야쿠는 결국 리에프의 반으로 찾아갔다. 메시지를 보내는 것보다 그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고, 리에프가 못 이기는 척 웃어 줄 거라는 기대도 조금은 있었다. 야쿠가 리에프의 이름을 말하자 교실 한 구석에 모여 있던 리에프와 그 친구들이 고개를 돌렸다.
"웬일이야? 하이바, 저 선배가 너 찾아왔네?"
"......"
리에프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어 야쿠는 교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살짝 놀란 듯 리에프의 눈썹이 움직였지만 그뿐이었다.
"리에프."
"...야쿠 선배."
리에프를 부르며 다가가던 야쿠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지금, 뭐라고?
"여기까지... 어쩐 일로."
어색하게 말을 끝맺으며 리에프가 시선을 피했다. 리에프의 친구들도 당황해 눈치를 보고 서 있었다. 야쿠는 망설이다 리에프의 팔을 잡았다.
"잠깐 얘기 좀 하자."
"......"
팔을 뿌리치거나 거절을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야쿠는 리에프를 붙잡은 채로 일 층의 화단까지 나왔다.
"잘... 지냈어? 미안했어, 정말. 나..."
"아줌마 이제 괜찮으신 거 알아,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야."
리에프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며 야쿠의 말을 끊었다.
"......리에프, 아직 화 났구나. 내가 물어봤던 거, 못 듣고 그렇게 가서 미안해. 다시 얘기하고 싶은데, 괜찮아?"
"나...... 미안."
리에프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리에프는 다시 고개를 들고 이번엔 야쿠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그 날 널 기다리면서, 그리고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너한테 어떤 정도인지 생각해 봤고... 내가... 너랑 같이 있는 게... 우리 둘 중 누구한테도 좋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아직 확실히 정하지는 못했지만. 그냥 그렇다는 걸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니라 진짜로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야쿠는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리에프를 다시 붙잡으려고 들었던 왼손은 허공에 멈추었다. 리에프는 잠시 야쿠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다가, 작게 웃으며 야쿠를 지나쳐 걸어갔다.
"너무 애쓰지 마."
그 말이, 가슴에 박혀들었다. 너... 나를 떠나는 거야? 야쿠는 그렇게 묻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리에프를 뒤돌아서 붙잡지도 못했다. 리에프는 사라졌고, 야쿠는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는 걔가 없으면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거든?'
앨리스가 맞았다.
야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표정을 유지하지 못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물었던 말이 있었으니 듣고 싶은 말이 있었고, 하고 싶은 말도 있었다. 사실은 이제 자신도 시작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거절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고, 이렇게 말 한 마디 꺼내기도 전에 막혀 버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야쿠는 수업 종이 울린 후에도 차가운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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