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ve Love
하이바 리에프 X 야쿠 모리스케
w.비누꽃
일기처럼 글로 기록하지 않아도, 어떤 기억을 생생하게 가져다 주는 것들이 있다. 언제든 이어폰을 꽂으면 그 노래를 처음 듣던 겨울날을 생각하게 해주는 음악이라든가 늦가을 매일 같은 길을 걸을 때 먹었던 사탕을 보면 그때마다 밟았던 낙엽의 바삭거리던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은, 바로 지금처럼. 여름 축제의 등불 밑을 걸을 때마다 나는 이 노란 불빛과 노점마다 피어오르는 연기,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언제나 여섯 살의 여름밤을 기억해냈다. 더 정확히는,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사람들 틈을 헤치던 여덟 살의 야쿠 모리스케의 뒷모습을.
물론 나는 일상에서 보는 거의 모든 것에서 모리스케를 떠올리지만, 쇼윈도에 걸린 니트를 보고 그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마음 같은 것과 이 마음은 조금 다른 갈래의 감정이다. 나는 내가 모리스케를 보며 갖는 마음들을 하나로 퉁치지 않고 세세하게 갈라 정리해 놓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받아주지 않는 내 마음은 언제나 혼자서 심심해했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있어도, 교실 책상에 엎드려 있어도, 창 밖으로 모리스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어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어도 나의 마음은 혼자서 차곡차곡 기억들을 정리하며 자신을 이리저리 쪼개어 놓았다. '너 나를 왜 좋아해? 너 나를 진짜 좋아해?'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하나를 빼앗기고 하나를 부정당해도 곧바로 새로운 조각을 꺼내 내밀 수 있게, 내 마음을 한치의 의심의 여지도 없도록 증명할 수 있게.
언젠가는 모리스케도 궁금해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으며 내 마음이 자꾸만 쌓여가는 먼지를 열심히 털어내도록 내버려 두었다.
-리에프, 너 집에 언제 올건데?
-누나가 무슨 상관이야. 거의 맨날 가잖아.
-아니, 너 러시아 안 갈 거야? 지금 짐 싸기 전에 쇼핑하러 갈 거야, 백화점 와서 짐 좀 들어!
-나 안 가는데. 짐은 들어줄게.
-이게 진짜 미쳤나. 아빠 삐졌잖아!
-다아아아음 방학때 갈거야, 끊어.
-너 그 꼬맹이랑 진짜 살림이라도 차렸,
뚝. 전화기 밖으로 새어나오던 목소리가 끊어졌다. 야쿠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별 생각 없이 리에프의 전화 통화를 엿듣고 있었다. 리에프의 아버지를 따라 쭉 러시아에서 살다시피 한 리에프의 누나는 어린 시절 가끔씩 야쿠를 마주칠 때마다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어보이곤 했었다. 야쿠보다 세 살이 많고 키도 어렸을 때부터 훤칠했던 그녀를 떠올리며 야쿠는 무심코 피식 웃었다. 부모님과 리에프가 안 볼 때마다 쥐어박혔던 것이 생각났다.
"모리스케?"
벌컥,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리에프는 이상하게 웃고 있는 야쿠를 보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괜히 전화 소리를 듣고 자신을 집으로 쫓아 보내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야쿠는 그저 가방을 고쳐 메며 리에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릴 뿐이었다.
"아줌마가 아까 전화로 이따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하셨는데."
"아, 진짜? 그럼 학원 끝나고 내가 데리러 갈게!"
"뭐하러 그래, 그냥 집에 가 있어. 누나 얼굴 자주 보지도 못하잖아."
"자주 봐서 뭐해. 걔가 어릴 때부터 너 괴롭혔지? 저번에 집 갔을때 자랑처럼 말하길래 내가 때려줄까 하다가..."
"하다가?"
"...내가 누나를 치기에는 너무 컸더라고."
으하하. 야쿠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지나쳐 신발장으로 가 운동화를 신는 야쿠를 리에프가 뒤따라가 껴안았다.
"왜 웃어..."
"아 너 진짜 컸다. 옛날엔 누나 볼 때마다 치고박고 싸웠잖아. 이제 누나가 너보다 작아서 봐주는거야? 대단하네."
"그러는 자기도 고등학생이면서... 그리고 걔가 너보다 크거든."
"시끄러워."
리에프는 어린애 취급에, 야쿠는 키 얘기에 둘다 발끈했다. 야쿠가 어깨를 흔들어 털어도 리에프는 떨어지지 않고 뒤에 매달려 야쿠의 목에 코를 박았다.
"데리러 가게 해 줘."
"방학인데 약속 없어?"
"너 학원에 있을 때 알아서 만나."
야쿠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리에프는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아쉬운 듯 리에프의 손가락이 야쿠의 손 끝에서 느리게 미끄러졌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괜찮아 보이네. 리에프의 눈이 꼼꼼하게 자신을 관찰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야쿠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 등을 바라보며 리에프는 이만큼의 일상이라도 다행히 여겼다.
리에프의 집에서 저녁을 먹은 뒤 야쿠는 리에프 없이 집으로 향했다. 리에프는 내일 러사아로 떠나는 누나와 엄마를 돕기 위해 집에 남아야 했다. 데려다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를 가까스로 뿌리칠 수 있었던 건 차키를 들고 나선 리에프의 누나, 앨리스 덕분이었다. 먼저 골목으로 나선 야쿠의 뒤로 슬리퍼를 직직 끄는 소리가 들렸다. 야쿠는 자신을 부르는 높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야, 꼬맹이."
"나 꼬맹이는 아닌데."
"밥은 먹고 다니냐? 왜 땅에 붙어다녀."
"여전하네. 무서워 죽겠다, 앨리스."
무심하게 웃는 얼굴을 찡그리며 내려다 본 앨리스는 주차장까지 골목을 따라 걸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야쿠가 그 모습을 흘끗 보자 곧바로 한 대를 내밀고는 플라스틱 라이터까지 던져 주었다.
"고마워."
"넌 리에프한테 사랑 받는 게 당연하지?"
"......"
앨리스가 갑작스럽게 던진 물음에 야쿠는 잠시 당황한 듯 말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뭐... 대답을 하라는 거야?"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 너는 걔 마음이 궁금하지도 않지? 너한테 죽고 못사는 게 그냥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같고?"
"시비걸지 마."
"시비가 아니야. 야, 당연한 마음이 어딨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없어졌을 때 못 견뎌."
야쿠는 담배 필터를 세게 빨아들이며 앨리스를 응시했다. 리에프와 아주 많이 닮은 얼굴이 놀리려는 듯 부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이상하게 보였다. 리에프는 그런 얼굴을 한 적이 없어서. 조금 신기하기도 해서 야쿠는 그 얼굴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내가 아빠 아프시다는 거짓말이라도 해서 리에프 러시아로 데려가면, 걔가 거기서 너 없다고 죽을까? 걔는 그렇게 흐물흐물한 애 아니야."
"그렇네..."
"근데 오늘 너 꼬라지 보니까 너는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거든?"
"음."
"그래서 그냥 냅두기로 했어. 넌 어릴 땐 의젓한 척은 다 하더니 왜 이렇게 됐냐?"
"누나가 맨날 쥐어박아서 그렇잖아."
피식 웃는 야쿠의 관자놀이를 앨리스의 검지손가락이 쿡, 밀었다.
"그렇게 자꾸만 쿨한 척 하지 말라고. 리에프 같은 애가 옆에 있는데 왜 에너지를 못 받고 썩혀."
"누난 싫지 않아? 리에프가 나 때문에 정신 못 차리는 것 같잖아."
"걔는 어릴 땐 더 덜떨어졌던 애거든? 네가 챙겨서 그나마 지금 저만큼이라도 멀쩡한 거니까 너 맘대로 써먹어. 모른 척 해 줄게."
"왜..."
"나는 걔 옆에 거의 못 있었으니까. 오히려 너랑 더 형제 같았지. 가끔은 나도 아쉬워."
"와, 웬일로 친누나 같네."
앨리스는 슬쩍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 시동이 걸리는 동안 안전벨트를 매며 야쿠는 가방을 품 안에 끌어안았다. 당연한 것이 없어지는 거, 그런 것쯤이야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럴 때 쿨한 척하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내 마음을 무너지지 않게 할 수 있지? 작게 한숨을 쉬는 것을 앨리스는 놓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야쿠는 새삼스럽게 리에프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네. 야쿠는 리에프에게 그의 마음에 대해 물어보는 게 오히려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사실 그런 생각도 그냥 한 순간 스쳐갔을 뿐, 깊이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단 한번도 물어보지 않는 게 오히려 상대에게는 더 상처였을까? 그렇게 뒹굴고 있으려니 머리맡에 놔둔 핸드폰이 웅웅 진동했다. 야쿠는 액정을 확인하지도 않고 손을 뻗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전화를 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여보세요, 하고 형식적인 말을 뱉기도 전에 리에프의 들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내일 밤에 같이 여름 축제 가자. 엄마랑 누나는 낮에 가니까.
"아, 벌써 축제 때지. 너 불꽃놀이 좋아하잖아, 그거 보면 되겠다."
별 생각 없이 던진 긍정의 대답에 수화기 반대편에서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야쿠에게는 순간 그 웃음이 아주 낯설게 다가왔다. 어린애 같지 않은 느낌. 조금 전까지 매달려 있던 덩치 큰 어린애와는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목소리에 야쿠는 잠시 핸드폰 액정을 다시 확인했다. '리에프'.
-데리러 갈게. 데이트니까.
"......"
-괜찮지?
"리에프, 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야쿠는 잠시 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리에프가 초등학교 때 붙여놓고 간 야광별이 아직도 반짝이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당연하게 봐 왔던 그 스티커의 존재가 갑자기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넌 내가 왜 좋아."
-......
리에프가 말문이 잠시 막힐 줄 알고 있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놀라서 그렇겠지. 야쿠는 몸을 틀어 누우며 핸드폰을 더 귀에 가까이 가져갔다. 묻고 나니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리에프는 뭐라고 말할까? 태어날 때부터 넌 운명이었어, 뭐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야쿠는 전화가 끊겼나 싶어 다시 액정을 확인했다. 통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리에프?"
-내일 말해줄게.
"어...?"
-대신 내일은 너도 긴장하고 나와.
"긴장을... 하라고?"
-나는 한동안 가만히 있겠다고 했잖아. 근데 모리스케가 물어봤으니까. 내일은 평소랑 다르게 만나 줘.
"......"
-내일, 내일 하루만이라도.
한 걸음만 내딛어도 리에프는 두 걸음 끌려온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시작 뒤에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붙잡는 말이 따라온다. 마치 야쿠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야쿠는 언제나 리에프가 자신에게 그의 페이스대로 대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을 받는 입장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좋을 대로 리에프를 대하던 건 나였나? 야쿠는 천장의 야광별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미안해졌다. 더 안타깝게도, 그런 미안함은 처음이었다.
-모리스케?
네 마음대로 나를 좋아하는 거니까 다 너의 몫인 줄 알았지, 나는.
"그래. 알았어."
금세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는 리에프의 목소리에 야쿠는 입을 열어 대답해 주었다. 리에프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야쿠에게는 아직도 어릴 때부터 응석이 심했던 리에프를 받아 주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고집을 부린 뒤 한 번씩 눈치를 살핀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밀려날까봐, 자신이, 약해 빠진 내가 힘들다고 할까봐.
전화를 끊고 야쿠는 깜깜한 방에 누워 눈을 뜨고 있었다. 어느새 리에프가 없는 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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