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마디 꽃
w.비누꽃
황묘족과 흑묘족의 소공자들이 모여 사는 가옥은 도성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축에 속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전각을 사용하는 것은 부족의 후계들이었다. 가장 안쪽에, 가장 아름다운 뜰을 가진 전각에는 큰 방이 두 개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야쿠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흑묘족의 소공자가 기거하고 있었다.
"한 해 동안이나 태자전하와 글을 읽었으면서, 너도 참 매몰찬 게 아니냐."
"시끄럽다."
야쿠는 책장을 넘기며 말을 붙여 온 쪽에 눈길도 주지 않고 대꾸했다. 그가 앉아있는 방은 뜰을 향해 창이 나 있었다. 여름임에도 쾌청한 밤바람이 열린 창으로 불어들었다.
또 한 사람, 야심한 시각임에도 뜰에서 밤공기를 맞는 남자는 창틀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키 크고 다부진 체격에 머리는 먹물을 풀어 놓은 듯 짙은 흑색이었다. 흑묘족의 후계, 쿠로오 테츠로는 눈을 내리깐 채 서책의 한 곳만 뚫어져라 응시하는 야쿠를 보며 오묘한 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오서 너를 이상하리만치 각별히 다루시는 것은 사운궁에만 알려진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근신이라니, 대체 무슨 짓을 했지?"
야쿠는 결국 서책을 쾅 덮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근신을 당했다는 사실이 이렇게 빨리 퍼졌다는 것이 거북했다. 쿠로오가 태자에게 배속된 무관임을 감안해도 그랬다. 쿠로오가 서 있는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온 야쿠는 다소 거칠게 창문을 닫아 버리려 했다. 그러나 창 밖으로 내민 손은 쿠로오에게 붙잡혔다. 쿠로오는 그 손을 스치듯 잡았다 곧바로 미끄러지듯이 놓아 주었다. 그 대신 창을 닫지 못하도록 상체를 방 안으로 잔뜩 기울였다. 야쿠는 말리려는 마음도 없이 그저 뒷걸음질쳤다.
"뭐, 내가 내일 입궁해서 알아보면 되는 일이긴 하지만."
"그럼 가서 잠이나 청해라."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보군."
오랜 벗인 쿠로오가 단번에 간파한 대로 지금 야쿠는 심기가 어지러웠다. 그는 창가에 기대앉아 머리를 무릎에 파묻었다. 태자, 아니 그 어린애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쿠로오는 열린 창문을 휙 타넘어 방으로 들어섰다.
"너는 글동무나 하는 거 싫어했잖아."
"관직도 얻기 전에 근신이다. 억울해."
"뭐, 보름이면 금방이다. 그 후엔 태자전하의 탄신일 연회이니 그 때 황상께 주청을 올리면 될 것이다. 족장께서 도와주실 테니."
야쿠는 머리를 들지 않았다. 쿠로오는 그 동그란 뒷통수를 내려다보다 손을 턱, 올려 몇 번 쓰다듬었다. 본래같았으면 이미 고개를 쳐들어 면박을 주고도 남았을 행동이었다. 그러나 야쿠는 그러고서 한참이 지나서야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래. 어차피 오나라로 가게 될 거다."
"역시."
쿠로오는 짧게 대답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가 다시 가볍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창을 뛰어넘어 어둠이 내린 뜰로 사라지자마자 야쿠는 일어서서 창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곧 칙서가 내릴 것이니 오래 마음 상해하지 않기로 했다.
*
리에프는 그림 같은 자태로 황제보다 한 칸 낮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줄곧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야쿠 모리스케가 보름 만에 입궁했을 것이다. 리에프는 태자궁에서의 그 날을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귀족들은 열네 살 난 태자의 아름다움을 공공연하게 떠들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를 한 귀로 흘리며 리에프는 고급 귀족만이 모인 사운궁의 한 구석에 서 있는 야쿠를 발견했다. 당장 일어서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억누르는 것은 이미 의식하지 않아도 몸에 자연스레 배어 있었다. 대신 리에프는 야쿠를 관찰했다. 황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올려 묶은 것도, 하얀 피부에 동그랗고 빼쪽한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도 그대로였다.
충동적으로 근신령을 내렸지만 되려 마음고생을 한 쪽은 리에프 자신이었다. 수심이라고는 담기지 않은 얼굴을 보며 리에프는 드물게 새치름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야쿠는 아무래도 리에프가 어색하고 어려워서인지 자신에게 탄신 축하 인사를 건네러 올라오지도 않고 있었다. 직접 불러야만 못 이기는 척 오겠지. 리에프는 태감에게 손짓했다. 리에프의 시선을 진작에 쫓고 있던 태감은 그 동작 한 번에 아랫것을 쿡 찔러 뜰로 내려보냈다.
"황묘족의 공자가 아직도 인사를 안 올린 게 말이 되나."
"불편해서 그래."
"같이 가자, 지금."
야쿠와 쿠로오는 둘 다 담벼락에 기대 서 있었다. 그럼에도 둘은 고급 귀족들 사이에서 확연히 눈에 띄었다. 황족인 백묘족에 다음 가는 제국의 두 세력인 흑묘와 황묘의 후계들이었다.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야쿠는 팔에 한 아름 안고 온 구절초 다발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꽃이었다. 그럼에도 가을의 입구에서 막 봉우리를 틔운 구절초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사실은 꽃 같은 것은 주기도 싫었다. 그저 예의상, 족장이 지정해 준 호사스러운 물건을 비단에 싸서 올리면 될 일이었고 또 태자와의 관계에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만 야쿠는 이 꽃다발이 태자에게 완전한 작별을 고한다는 의미가 되길 바랐다. 처음 어린 칠왕자였던 그를 매몰차게 거절했던 그 때보다 더욱 확실하게.
야쿠는 때마침 그를 찾아온 태감을 따라 황제와 태자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쿠로오와 그는 정해진 예법에 맞추어 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리에프의 빛나는 눈이 빈틈없이 야쿠를 주시했으나 야쿠는 그 시선을 애써 못 본 척하며 그의 앞에 가지고 온 구절초 다발을 올렸다. 리에프의 눈썹이 움직였다.
"이건 뭡니까."
"가을꽃이 피었기에 좋은 날을 위해 따왔나이다."
"소공자는 구절초의 의미를 아시오?"
황제의 앞이었기에 리에프의 말투에 힘이 실렸다. 황제는 별 관심도 보이지 않고 쿠로오에게 인사치레를 건네고 있었다.
"의미는... 모르오나 저에게는 작별 인사와 같은 것입니다."
"좋은 날이라면서 다 망치는군."
혼잣말을 하며 황제 쪽을 흘끗 본 리에프는 상 밑에서 더 커다란 꽃다발을 꺼내들었다. 구절초였다.
"구절초는 순수한 연심을 뜻합니다. 아직 그대에게 이 꽃을 줄 수 있음이 기쁘군요. 받으세요."
야쿠는 마지못해 무릎을 꿇고 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 연습해 온 작별인사의 첫 마디를 떼었다.
"소신 오나라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리에프는 단번에 야쿠의 말을 잘라 버렸다. 그에 따른 구구절절한 작별의 말은 듣지도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는 사이 황제가 야쿠의 이름을 불렀다. 야쿠는 하는 수 없이 리에프에게서 몸을 돌려 황제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가 먼저 입을 떼었고 리에프는 어느새 굳은 표정으로 야쿠의 얼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소공자. 황묘족장에게 이미 전해들었느니. 그대는 앞으로 제국을 떠받칠 인재 중의 인재이니 미리 다른 세상을 보고 오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한 신분 역시 모자람이 없음이야."
리에프는 마지막으로 한 번 방해해볼까 아주 찰나를 고민했다. 그러나 감히 황제의 말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가만히 듣고만 앉아 있는 리에프의 손가락이 자개가 박힌 술상을 세게 움켜잡았다.
"야쿠 모리스케의 오나라 사절단 합류를 허한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야쿠의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번졌다.
왕자들 중 하나를 오나라에 볼모로 보내는 것은 제국과 오나라의 화친을 위해서였다. 작은 오랑캐로만 보았던 오나라가 세를 확장해 나감에 따라 제국에서도 그쪽을 달랠 필요가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관계없이 야쿠는 일단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리에프 태자에게 붙들려 있는 것도 불편했고, 죽은 태자를 떠올리게 하는 태자궁에 들어야 하는 것도 아직 마음 아팠다.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 황제에게 절을 올리며 바닥에 고개를 조아리는 동안 옆에 놓인 구절초에서는 애련한 향기가 풍겼다. 야쿠는 그 꽃이 자꾸만 심을 이상하게 간질이는 것을 그저 외면해 버리고 싶었다. 첫 접문의 상대가 태자였기 때문에, 단순히 그렇기 때문에 신경쓰이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어느 누가 진정으로 무시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제국의 태자의 끈질긴 관심을.
연회는 무르익고 밤은 깊어만 갔다. 아직 어린 리에프의 상에는 아주 연한 국화주가 올랐다. 여기 저기가 온통 국화꽃이었다. 리에프는 초가 밝혀진 붉은 등과 악기 연주 소리, 등 뒤로 우거진 풀숲과 나무들 사이사이에서 들리는 풀벌레 울음 소리에 그만 정취에 흠뻑 취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마음이 울렁였다. 냉정한 태자의 얼굴 뒤에는 아직 단단하지 못한 연정이 남아 있었다. 리에프는 야쿠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운궁의 전각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따라 일어났다. 그에게 주지 못한 것이 남아있었다.
리에프는 전각의 긴 통로를 느리게 걷는 야쿠를 어렵지 않게 따라잡았다. 사운궁에서도 태자의 침소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리에프는 그 사실을 이용해 야쿠에게 농을 걸까 하다 곧 그만두었다. 자존심만 다칠 것이다. 그는 휘적휘적 걸어 야쿠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야쿠가 그를 알아채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같은 꽃을 준비했는데 의미가 달랐군요."
"태자 전하."
"알기 전에는 내심 기뻐했습니다. 또 이렇게 실망할 걸 알면서도."
리에프는 예를 갖춘 야쿠에게 직접 손을 내밀어 일으켰다. 눈을 맞춰줄 때까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통에 야쿠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태자와 눈을 맞추었다. 야쿠는 리에프가 준 꽃을 그대로 품안에 가득 안고 있었다. 다발이 풀어진 것을 보니 궁녀를 시켜 다시 묶어 달라고 할 셈이었던 모양이었다. 리에프는 꽃에게 잠시 주었던 시선을 옮겨 다시 야쿠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볼 수 없을 걸 알기에... 화가 나는데도 화를 낼 수가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소신 새로운 문물을 두루 겪으며 배우고자 합니다."
"그대는 거짓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니 내 앞에서 변명은 필요 없어요."
야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태자의 어조에 화가 묻어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사자의 날카로운 눈빛이 누그러진 듯 처연한 연민이 비치기도 했다. 야쿠가 조금은 의문을 품고 그의 앞에 서 있는 동안 리에프는 품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졸라맨 끈을 손수 푸르고 그 안에서 꺼낸 것은 흰빛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옅은 붉은색의 홍문석 가락지였다.
홍문석은 사심없는 연정을 의미하는 보석이었다. 리에프는 야쿠가 보석에 큰 관심이 없다 해도 홍문석을 모를 리는 없으리라 믿었다. 리에프는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야쿠의 한 쪽 손을 잡아들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다. 야쿠의 손이 어쩔 줄 모르고 굳었다.
"소공자가 제국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다시는 지금처럼 나를 외면할 수 없을 겁니다."
"송구하오나 소신 태자전하께 여쭙고자 합니다. 어째서 제게..."
용기 있게 말을 꺼냈으나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리에프가 야쿠에게 한 발짝 더 다가와 그의 어깨를 세게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품에 가득 안긴 꽃송이가 눌리고 찌그러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에프는 야쿠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은은한 꽃향기와 함께 야쿠의 황색 머리칼이 부드럽게 뺨에 닿았다. 야쿠는 아직은 여린 소년의 팔이 자신을 빈틈없이 가두는 통에 놀란 숨을 들이마셨다.
"나 역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그대에게 이렇게 마음을 주고 있는지."
"......"
"나는 이미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어요. 더이상 내가 어린애가 아닐 그 순간을요."
리에프는 말을 마친 뒤 야쿠를 품에서 놓아 주었다.
"가락지는 곧 관례를 올릴 그대에게 내가 내리는 것입니다. 태자의 하사품이니 하찮게 다루지 마세요."
리에프는 마치 혼례의 증표와도 같은 가락지를 관례의 하사품이라 칭했다. 거기에 야쿠가 가락지를 감히 내버리지도 못하도록 못을 박은 뒤 그는 품에서 두 번째 선물을 꺼내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뱉는 리에프의 목소리에 체념과 같은 웃음이 섞였다.
"이렇게 떠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저 장신구를 주고 싶어 준비한 것인데... 나는 오나라에서도 이것이 장신구 외의 용도로 쓰일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하얗게 빛나는 은장도가 야쿠의 손에 쥐어졌다. 한 팔에는 꽃을 한 아름 안고 다른 손에는 은장도를 들고 있는 그가 리에프의 눈에 온통 눈부셨다.
리에프는 잠시 야쿠의 눈을 바라본 뒤 돌아섰다. 방금 전과 같은 촉촉한 눈빛의 소년은 온데간데 없이, 등을 보이고 큰 보폭으로 걸어가는 고귀한 이는 그저 황궁의 백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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