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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HQ!!

[오이스가] 녹여줘 02





녹여줘

오이카와 토오루 X 스가와라 코우시





w.비누꽃










이른 아침부터 샵에 들러 메이크업을 받고 오느라 스가와라는 조금 지친 상태였다. 그에게 NKK의 대기실은 이상하게 유독 갑갑하게 느껴졌다. 아직 녹음도 들어가지 않은 라디오 드라마를 홍보하기 위한 녹화라니, 스가와라는 이렇다 할 녹음실 에피소드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방송 분량을 뽑아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 역시 함께 출연하는 성우들과의 지난 이야기나 하고, 드라마 장면이나 좀 보여주는 정도려나. 비타민 음료 한 병을 따 마시고 목캔디의 포장을 뜯으며 그는 대기실 밖으로 나섰다. 


복도에 작게 만들어 놓은 휴게 공간에는 이미 누군가 와 있었다. 얼굴을 대본으로 가린 채 다리를 쭉 뻗고 미동 없이 앉아 있는 남자. 스가와라는 그 남자의 길게 뻗은 다리와 단정하면서 세련되게 차려입은 정장, 얼굴을 가린 종이 뒤로 삐죽이 보이는 잘 매만진 갈색 머리칼을 보고 그가 오이카와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워낙 TV만 틀면 나오는지라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의 모습이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입 안에 목캔디를 굴리며 스가와라는 소파의 한 쪽 끝에 조용히 앉았다. 그러나 굳이 오이카와를 깨우고 싶지 않았던 노력이 무색하게 작은 인기척에도 오이카와는 곧바로 몸을 똑바로 일으켜 앉았다. 대본이 그의 무릎으로 떨어지고, 잠에 취해 살짝 충혈된 눈이 드러났다.


"......아."


"안녕하세요."


이렇게 빨리 오이카와와 인사를 나누게 될 지는 몰랐던지라 스가와라는 살짝 당황했다. 그럼에도 담담히 건넨 인사를 멍하니 흘려들으며 오이카와는 잠시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미 헤어 메이크업과 의상까지 셋팅이 끝난지라 함부로 눈을 비비거나 머리를 만질 수도 없었다. 사실 오이카와는 어제 저녁 뉴스가 끝난 뒤 방송국에서 밤을 새고 새벽 일찍 목욕탕에 갔다가 분장실에서 메이크업까지 받고 온 차였다. 목을 가다듬고 스가와라에게 인사를 건네며 오이카와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스튜디오에서 자기 할 일만 잘 해내면 되는데도 스가와라에게 쪽잠을 자는 모습을 들킨 게 못내 신경쓰였다.


"스가와라 씨, 오늘 녹화 잘 부탁드립니다. 두 시간 정도 남았는데... 어제 못한 거 마저 봐주실 수 있나요?"


애써 살가운 말투로 먼저 말을 붙인 것은 오이카와였다. 밤새 오늘 녹화 준비와 함께 라디오 드라마의 대본 연습까지 하느라 몸이 쑤시고 피곤했지만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전혀 잠기지 않고 맑았다.


"그럴까요? 이번엔 제 리딩 없이 오이카와 씨 부분만 봐드릴게요."


스가와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이카와는 손에 겹쳐 들고 있던 드라마 대본을 꺼냈다. 대본을 넘기며 맞은편에 앉은 스가와라를 슬쩍 본 오이카와는 오늘도 그의 얼굴이 참 하얗게 빛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예쁜 얼굴이 무섭게까지 느껴져서... 이런 정도의 압박감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오이카와는 애써 대본으로 시선을 내렸다.


"더이상 사랑을 말할 수 없게 되었던 그."


"아, 방금은 진심이네요."


스가와라의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오이카와는 머쓱한 웃음을 따라 지으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욕이야, 칭찬이야? 칭찬에 가깝겠지. 그렇게 자기위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가와라는 살짝 입술을 깨무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응시했다. 자존심과 의지는 강한데 의외로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방송에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스가와라는 개인과외까지 신청하는 열정에 비해 경직되어 있는 오이카와의 태도가 의아했다. 더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더 적극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왜 마음을 닫고 계세요?"


돌려 말하는 법은 잘 알지 못했다. 스가와라는 그 대신 따뜻한 목소리를 내는 편을 택했다. 어제는 그냥 얼굴 반반하고 대본 잘 읽는 아나운서가 그렇지 뭐, 하는 생각이었다면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그가 안쓰럽게 보였다. 목소리도 좋고, 가끔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진행이나 뉴스도 다 괜찮았는데 왜일까. 스가와라는 그가 조금 궁금해졌다.


"마음을... 닫..."


말을 하는 직업을 가진 오이카와가 말끝을 흐리거나 더듬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스가와라의 앞에서는 자꾸만 주눅이 들게 된다. 오이카와 스스로가 가장 당황스러웠다. 잘할 수 있다는 확신, 실제로 잘해내는 악바리 같은 성격, 그게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감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라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자신을 이토록 작아지게 만드는 건지. 오이카와는 메이크업이 되어 있는 것도 잊고 마른세수를 했다. 금세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오이카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를 구해준 것은 등 뒤로 나타난 이와이즈미였다. 그저께에 이어 어제도 방송국 당직실에서 자고 일어난 그는 편집실의 공기가 지긋지긋해 막 복도로 나선 차였다. 스가와라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확인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스가와라 씨? 오랜만에 뵙네요. 오프닝에 노래하시는 거 좀이따 바로 리허설 시작합니다. 방금 매니저 분 만나고 왔어요."


"네, 준비 됐습니다."


이와이즈미의 사무적인 말투에 스가와라는 예의를 차리면서도 여유 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깡이 장난 아니네. 오이카와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앉은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와이즈미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는 모습을 보니 역시 피디를 했어야 하나, 하는 부러움까지 느껴졌다.


"야, 오이카와. 넌 가서 잠 좀 자고 와. 못생기게 나오면 시청률 떨어진다."


제발 스가와라 씨 앞에서는 나를 좀 존중해 줄래...? 오이카와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더 찡그릴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큰데다 굽이 있는 구두까지 신은 탓에 눈높이가 이와이즈미와 스가와라보다 훅 위로 올라갔다. 둘의 눈빛이 동시에 살짝 샐쭉해졌다.


"잠 안 자도 되거든. 너나 잘해, 이와짱."


네가 이렇게 나오는데 내가 널 피디라고 불러줄 것 같아? 오이카와는 그런 표정으로 이와이즈미를 일부러 턱을 들고 내려다보았다. 


"너 때문에 나까지 잠 설쳤잖아. 당직실에서 밤새 대본 중얼중얼거려서. 저번에도 이틀 밤새고 아침 녹화 들어갔다가 멘트 꼬인거 잊었냐?"


"......"


"밤 새셨구나. 오이카와 씨, 저도 리허설 있고 해서 아무래도 녹화 후에 다시 뵈어야겠어요. 먼저 실례해도 될까요?"


말문이 막힌 오이카와의 얼굴이 살짝 빨개진 것을 보지 못한 척 스가와라는 말을 꺼냈다. 입사동기라더니 오이카와와 피디는 정말 친해 보였다. 자신도 잘 나가는 성우지만 방송국 밖의 프로덕션에 소속된 몸이니 어쨌든 피디에게 잘 보여야 하는 처지였다. 아나운서라고 크게 다르진 않을 텐데 거리낌 없이 지내는 모습이 좀 부럽기는 했다. 그래도 스가와라는 그런 티는 전혀 내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돌아섰다. 


목소리가 깨끗해서 몰랐는데 눈이 빨갰던 건 잠을 못 자서였구나. 하긴 그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관리도 철저하니까 그 자리에 있는 거겠지. 방송국은 저 사람한테서 뭐를 더 뽑아내려고 라디오 드라마까지 시킨담? 잘 하는 것만 시켜도 시간이 부족할텐데. 스가와라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이 바닥 일이 힘든 건 매한가지니 딱히 안쓰럽지는 않아도 이전보다 오이카와에게 동질감은 좀 느껴졌다. 


스가와라가 멀어지자마자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원망 섞인 눈길을 던졌다. 


"뭐."


"내가 어제 그렇게 머리빠지게 고민하고 있었던 거 알면서. 친구 자존심은 못 세워줄 망정 초를 치냐?"


"내가 뭘? 사실이잖아. 그리고 너는 평소 이미지가 더 재수없는 느낌이야, 같은 남자가 보기에."


"......아무리 그래도 난 완벽한 모습만 보이고 싶거든."


"넌 엄청 노력하는 타입이고 그거 다 거짓말이잖아. 내레이션 잘 하고 싶으시다면서?"


"피디로서 해주는 말이야?"


"당연하지. 피디로서 한마디 더 하자면 오늘 의상 패턴이 너무 정신사나워."


"메인 피디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지적할 필요 없잖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새삼스럽게 정장을 다시 살폈다. 핏도 마음에 들고 컬러도 괜찮은데, 다시 보니 너무 화려한 것 같기도 하고. 얼굴에 드러난 생각을 다 읽었다는 듯이 이와이즈미는 픽 웃었다.


"너 아까 드라마 대본 읽는 거 봤어. 팍 쫄았던데? 이따 녹화 때도 그러고 있으면 녹화 안 끝난다."


"당연히 잘할 거야. 날 뭘로 보고."


오이카와는 순식간에 눈빛을 달리하며 팔짱을 꼈다. 저 독기 좀 봐. 이와이즈미는 차가운 자신감이 흐르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훑으며 그의 등을 퍽, 쳤다. 대학 동기이자 입사 동기인 이 재수 없게 잘생긴 친구의 텐션을 올리는 방법쯤이야 이미 열 가지는 알고 있었다. 






스튜디오 구석에 서서 스가와라의 노래를 듣는 오이카와의 표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차분했다. 작년 대흥행을 기록했던 애니메이션 영화의 OST가 울려 퍼지는 스튜디오는 어떤 순수한 감성으로 흘러 넘치고 있었다. 피아노와 스트링 반주에 올려진 스가와라의 목소리에는 멜로디와 가사가 담고 있는 애니메이션 특유의 환상과 마음 속 깊이 숨겨진 동심을 끄집어내는, 설득력과 진정성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러니까, 거짓이 아닌 진실한 연기라는 게 이런 거란 말이지. 


오이카와는 자꾸만 턱을 매만졌다. 


영혼이 있다는 거, 의미가 있다는 거, 마음을 움직이는 게 이런 거라고. 


의식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찌르르 울렸다. 감동 받고 있었다. 


이런 사람과 어떻게 같이 드라마 녹음을 하지? 내가 다 망쳐 버릴거야. 운이 좋아 봤자 아무도 내가 참여했다는 걸 기억하지도 못하는 정도일까. 


오이카와의 손 안에서 대본이 구겨졌다. 부러웠다. 스가와라 앞에서 자꾸만 작아졌던 건, 그가 자신이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걸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저 진실함,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솔직함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화려하게 포장하지 않아도 가치 있는 사람. 다이아몬드 같은 존재감. 

오이카와는 필사적으로 감춰 온 얼어붙은 마음까지 꿰뚫어 본 스가와라라는 존재 앞에 이제까지의 자신을 송두리째 흔드는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잠깐 휴식할게요!"


헤드셋을 낀 조연출의 외침을 들으며 오이카와는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헤집었다. 저 앞에서 이미 이와이즈미가 손짓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평소처럼 진행은 매끄러웠고, 애드립은 센스 있었다. 분위기도 최고였다. 이번 라디오 드라마의 주연 성우들을 모아 놓았음에도 오이카와는 절대 밀리지 않고 엠씨로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연진들이 호감이 가득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채로 오이카와는 세트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뭐가 문제야."


"오이카와, 너 아무런 문제도 없어. 근데 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정신이 빠졌어?"


"문제가 없긴 뭐가 없어. 알맹이가 없었잖아, 모르는 척 하지 마."


"알맹이는 무슨, 진행 좋게 가고 있는데 알맹이 타령이야."


오이카와가 입을 굳게 다물고 버티고 서 있자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며 조연출을 소리쳐 불렀다.


"킨다이치!"


"네, 선배님!"


"담배 있냐?"


"있습니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신입 피디를 쓱 훑은 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나는 상대하기 싫다 이거지."


"오늘은 나도 집에 좀 들어가자. 이대로 쭉 가고 끝낼거야."


이와이즈미는 잔뜩 몸을 파묻고 있던 감독용 의자에서 일어나 스튜디오를 나가 버렸다. 요즘, 그러니까 그 망할 라디오 드라마에 캐스팅 된 이후로 너무 징징거리긴 했다. 달리 속마음을 터놓는 사람이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오이카와는 가라앉은 마음으로 세트로 올라섰다. 그러자 게스트석에서 수군거리고 있던 성우 몇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오이카와 씨, 기념사진 찍어 주세요!"


평소였다면 이런 반응을 보자마자 당장에 텐션이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효과는 있어서, 오이카와는 카메라용 웃음을 환하게 지으며 핸드폰 카메라 앞에 얼굴을 들이밀어 주었다. 그러나 곧 대본을 들여다보는 척 하며 세트 구석에 혼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을 스가와라는 남김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스가와라가 보기에 오이카와는 분명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가진 게 잘 생긴 얼굴뿐이었다면 몇 년 동안 대중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너무 진지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뉴스든 예능이든 어느 방송에도 잘 녹아드는 스타일. 남들이 부러워할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진 사람인데 무엇이 그를 짓누르는 걸까? 왜 내레이션을 못 하는 걸까. 그러니까 왜... 마음을 닫아걸고 있는 걸까. 자신도 그걸 알고 괴로워하고 있으면서. 


생각에 빠져 오이카와를 바라보던 스가와라는 문득 고개를 든 그와 한순간 눈이 마주쳐 버렸다. 오이카와는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켜 스가와라에게 다가왔다.


"스가와라 씨, 죄송하지만 오늘 개인레슨은 쉬어야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시간이 필요해요."


아, 도망치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매끄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대답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동안 시선이 계속해서 얽혀들었다. 왠지 모르게 스가와라는 그가 도망치려 하는 게 싫어졌다. 남의 인생에, 마음에 참견할 이유는 없었지만 어쩐지 오이카와의 삐걱거리는 부분을 고쳐 보고 싶었다. 조금 궁금해졌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그렇게 단단하게 굳혀 버렸는지. 그래서 스가와라는 할 말을 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수업 대신 술 한 잔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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