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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HQ!!

[오이스가] 녹여줘 01






녹여줘

오이카와 토오루 X 스가와라 코우시





w.비누꽃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케줄표를 보며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NKK 방송국의 간판이자 연예인급 인기를 누리는 간판 아나운서로서, 스케줄이 빡빡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 잡혀 있는 것을 보며 오이카와는 이미 국장의 책상으로 달려갔다 온 뒤였다.


'국장님, 저... 라디오 드라마를 왜 제가...?'


'그 프로 좀 띄워보려고 하는 거니까 잔말 말고 들어가. 다른 건 성우들이 알아서 할 거고, 오이카와 씨는 내레이션만 맡으면 돼.'


'저 내레이션 약한거 아시잖아요!'


'너 입사가 몇년찬데 아직도 그 소리야?'


뉴스면 뉴스, 엠씨면 엠씨, 예능, 교양프로, 녹화방송과 생방송을 가리지 않고 오이카와는 뭐든 자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름을 알리기 전, 입사 초기 맡았던 자연 다큐에서 피디와 시청자들에게 혹평을 받은 이후로 그는 내레이션이라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쿵 내려앉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오이카와는 늘 방송을 앞두면 머리를 싸매고 긴장했다. 그는 이 완벽주의가 언젠가 자신을 정말 폭발시켜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도 20년 넘게 그렇게 살아온 것을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레이션이라니...


"저 이번 녹음 명단 좀 주세요."


결국 오이카와는 작가에게 이번 회차의 캐스팅 명단을 받아들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그 오명을 씻고, 내레이션에 대한 부담감도 떨쳐 버리자는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정리한 뒤였다. 명단은 그를 제외하고는 전부 성우들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었다. 오이카와의 시선이 그 중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성우의 이름에 머물렀다.


"스가와라 코우시... 저 이 사람 알아요, 유명하죠?"


"완전 아이돌이죠. 캐스팅 진짜 힘들었어요."


작가를 붙들고 스가와라 코우시 성우에 대해 질문하며 오이카와는 깔끔히 면도된 턱을 살짝 쓸었다. 흐음. 그 얼굴을 보며 작가는 오이카와 모르게 뺨을 붉혔다. 오이카와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려는 작가의 노력 같은 건 알아차리지도 못한 듯 담담하게 부탁의 말을 건넸다.


"연락처 좀 주세요."






 


"......저, 안녕하세요."


"아아.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오이카와는 처음 대면하는 스가와라를 잠시 바라보았다. 색이 옅은 머리카락에 하얗고 부드러운 인상의 얼굴, 눈 밑에 선명하게 찍힌 눈물점. 뭔가 타고난 얼굴이네. 그게 오이카와의 스가와라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오이카와는 이번 라디오 드라마를 반드시 잘 해내고 싶었다. 얄쌍하게 잘생긴 그의 얼굴은 잘 놀고 뺀질거릴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 일쑤였지만 사실 오이카와는 굉장히 성실한 축에 들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외모, 균형 잡힌 몸, 철저한 컨디션 조절로 유지하는 깨끗하고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와 사회 전반에 걸친 폭넓은 지식. 이런 것들은 전부 피나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그는 실력을 쌓기 위해 누군가에게 배움을 청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자존심을 부리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게 오이카와의 생각이었다. 


오늘도 그는 스가와라에게 내레이션을 배우기 위해 막 그가 소속된 유명 성우 프로덕션까지 찾아온 차였다. 스가와라보다 더 연차가 있는 중견 성우에게 배울 수도 있었지만, 오이카와는 자신의 또래들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성우에게 더 묻고 싶고 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게다가 같은 작품에 출연하기로 했으니 더욱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는 한겨울의 칼바람이 부는 바깥을 뒤로하고, 입구로 자신을 마중 나온 스가와라를 따라 회사로 들어섰다.




스가와라와 오이카와가 들고 있는 대본은 둘 다 이미 손을 탄 티가 났다. 각자 자신의 배역에 형광펜이 쳐져 있는 것도 똑같았다. 오이카와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힐끔 스가와라의 손을 바라보았다.


"대본 이미 보셨나 봐요."


"네, 오이카와 씨도 리딩하고 오셨나 보네요. 그럼 한 번 해보실래요?"


"저기, 일단 오늘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흔쾌히 받아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이번 드라마, 저도 진짜 잘 해보고 싶거든요."


그 말을 하며 스가와라는 처음으로 오이카와의 앞에서 웃었다. 입술 양 끝이 위로 슬쩍 솟고, 둥그런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새하얀 얼굴에 매끄럽게 퍼지는 그 웃음을 보며 오이카와는 순간 천사라도 만난 듯 황홀하고 가슴이 설레었다.


"제 대사가 먼저니까 일단 한 번 리딩할게요."


대본으로 시선을 내린 스가와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한층 더 화사하게 빛났다. 곧 그의 입에서 단정하고 다정한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탄탄하게 모인 발성... 아름다운 목소리다. 오이카와는 긴장감을 느끼며 어딘지 모르게 말라가는 입술을 축였다.





천사...? 오이카와는 잠시 그 느낌이 착각이었는지 확인해 볼 시간이 필요함을 느꼈다. 천사라는 말은 잠시 뒤로 밀어두고, 오이카와는 세 번째로 다시 첫 줄을 읽었다. 스가와라의 리딩을 이미 들어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배에 탄탄하게 힘이 들어갔다.


"이 세상 어떤 것도 히로키에게는 소용없었다. 그녀가 아니라면,"


"다시요. 책읽듯 하지 마시고, 말로 해주세요."


하. 오이카와의 입에서 마침내 작게 한숨이 샜다. 오이카와 역시 그동안 수많은 프로그램의 대본을 접했고, 글로 쓰인 대사를 프로답게 자연스러운 리딩으로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그가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책 읽지 말고 말을 하라니. 그런 지적을 받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그렇게 국어책 읽듯이 하고 있나요?"


"음..."


그 말을 듣고 스가와라는 잠시 고민하듯 턱을 괴었다. 맑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오이카와는 그 시선을 맞받으면서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원래 배우들은 이런가. 이렇게 여과 없는 표정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스가와라는 손을 뻗어 테이블 한쪽 구석에 놓인 신문을 집어들었다. 


"죄송하지만 뉴스 리딩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아, 네."


신문 읽는거야 매일 아침마다 하는 아나운서로서의 일과였다. 저녁 뉴스를 맡았으니 뉴스 대본이라면 자다가도 줄줄 외울 정도였고. 오이카와는 망설임 없이 1면에 실린 기사 하나를 읽었다.


"아아. 그렇구나. 그렇네요."


"뭐, 뭐가요?"


이상하게 자꾸만 당황하게 된다. 오이카와는 살짝 민망해져 신문을 옆으로 치워 놓고 괜히 와이셔츠 소매를 걷었다. 그리고 스가와라의 대답을 듣기 위해 얼굴을 마주하며 자연스럽게 다년간 써먹어 온 방송용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본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웃으시는 것도요. 다 가짜예요."


"가... 짜...?"


"의미를 담아 주세요. 아나운서시니까, 글자를 읽어내는 능력은 정말 대단하신데... 근데 감정이 안 느껴지거든요."


"잘 이해가 안 돼요."


"아나운싱에는 감정이 들어가나요?"


"...음. 인간적인 따뜻함은 필요하지만 언론 보도에 개인적 감정은 들어가면 안 돼요."


"그것 때문인 것 같아요. 라디오 드라마는 연기의 영역이니까 감정을 배제하시면 안 돼요. 3인칭 내레이션이니 뚜렷한 연기까지 담지는 않더라도, 감정은 있어야죠."


조용히 설명하는 스가와라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피디님도 오이카와씨께 연기를 바라진 않으시겠지만. 이것보다는 잘 하셔야 될 것 같아요."


그 말을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했다. 오이카와는 난생 처음 듣는 지적에 당황한 얼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물론 대화를 계속해서 더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대본을 덮어 버렸다.


"저, 스가와라 씨."


"아직 녹음까지 며칠 남았으니까, 내일 다시 뵐게요. 저 내일 NKK에 녹화가 있어서 방송국에서 뵐 수 있겠네요."


"그 말씀은... 오늘은 더 뭔가를 해볼 수준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스가와라는 아주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자존심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스가와라의 뒤에 보였던 듯한 후광과 날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는 스가와라를 따라 오이카와도 얼른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당황과 의문이 남은 오이카와의 얼굴을 본 스가와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일반 연예인하고 라디오나 더빙 녹음하는 거 굉장히 싫어합니다."


"......"


"그래도 오이카와 씨는 아나운서니까, 내레이션 정도는 같은 영역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네."


"사실은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영혼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뭔가 마음을 꽁꽁 숨기는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은 더 못하겠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오이카와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의자에 걸어 둔 코트를 집어들었다. 약간 긴장감마저 느껴지는 오이카와의 표정에 스가와라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비비꼬았다. 스가와라의 얼굴 근육이 움직였다.


아, 나 완전히 이 사람한테 바보 멍청이로 보였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얼굴에 떠오른 비웃음을 보며 절망했다.


"아나운서시면서 발성까지 밀리시면... 녹음 때 성우들하고 엄청 비교될 텐데요."


"......"


"내일은 좀 더 나아지시길 기대할게요."


말을 마친 스가와라는 친절하게 연습실 문을 열고 오이카와가 나갈 수 있도록 비켜 섰다.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손에 든 채 연습실을 나서며 오이카와는 속으로 눈물을 한 바가지 가득 쏟았다.







방송국으로 복귀한 오이카와는 빈 녹음실을 아무 데나 찾아들어가 무슨 제사 의식이라도 치르는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로 발성 연습을 해댔다. 그리고 나서는 팬들이 아나운서국으로 보내 준 배즙의 포장을 거칠게 찢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야... 너 뭐 하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녹음실 문을 벌컥 열며 들어선 이와이즈미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는 표정으로 오이카와에게 휘적휘적 걸어왔다.


"이와짱... 또 밤 샌거야? 그래도 옷은 좀 갈아입어."


"지금 목욕탕 갈 거거든?"


예능국 피디인 이와이즈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옷소매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오이카와는 질색하는 얼굴로 동료의 모습을 지켜보다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왜 엔지니어실로 안 가고 녹음실로 왔어?"


"아, 마이크 좀 보려고. 근데 너는 왜 여기 있냐고."


"난 녹음실에 있으면 안 돼? 내가 엔지니어실에 있는게 더 이상하지 않아?"


"......왜 시비야. 또 어디 가서 털렸냐? 너 개인레슨 받으러 갔었다며."


"그것 때문에 미치겠다, 진짜."



이와이즈미는 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오이카와는 장비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상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 이제 약발이 다 했나봐."


"뭐야, 똑바로 말해."


"다 들켰어. 아, 가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정곡을 찔려서 말도 안 나와."


"그러니까 뭘!"


"내가, 내가 딱 연기 비슷한 거 발만 들여도 밑바닥 보이는 거! 다 들켰다고 젠장할!"


"...아아, 난 또 뭐라고."


곧바로 흥미를 잃은 듯 마이크를 이리저리 만지는 이와이즈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허, 하고 한숨을 뱉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는 아랑곳하지 않고 녹음실을 나가 손잡이를 세게 올려 닫았다. 그리고는 곧 엔지니어실로 들어서서는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이카와에게 손짓했다. 오이카와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어폰을 집어들어 귀에 꽂았다. 곧 마이크에 대고 지시하는 이와이즈미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들려왔다.


-야, 거기 2번 마이크에 테스트 좀 해봐.


"......뭐. 됐냐?"


-한 줄 이상 똑바로 말해.


"......짜증나. 내 고민에 관심도 없냐? 친구 맞아?"


-소리 괜찮네. 너 발성 좋아졌다?


"나 그 내레이션 잘 하고 싶다고! 언제까지 숨을 수는 없잖아!"


-야! 마이크 조심히 안 다뤄? 시끄러워!


"네가 더 시끄럽거든? 귀 찢어지는 줄 알았어! 야, 됐지? 마이크 잘만 되는데 왜 난리야! 나 나간다!"


이어폰을 확 잡아빼자 유리창 너머로 이와이즈미가 뭐라고 소리지르는 지 하나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꾹 깨물며 녹음실 밖으로 나섰다. 그 옆의 방음문이 열리고 이와이즈미가 팔을 걷은 채 뛰어나왔다.


"오이카와!"


"...지금 나 건드리지 마."


"뭐야, 왜."


"그럼 나 내일 대타엠씨 써줘."


"미쳤냐? 내 프로 망치지 마."


"......내일 그 성우 나온단 말야!"


이와이즈미는 망설이다 뱉은 오이카와의 외침을 듣고 코웃음을 치며 엔지니어실에서 들고 나온 두꺼운 대본을 그의 가슴팍에 턱, 하고 안겨주었다. 오이카와는 잔뜩 짜증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너는 배려심이라고는 없지?"


"뭐, 그 성우한테 가서 네 마음 꽉 닫힌거 다 들키고 왔다는 거? 그걸 어쩌라고."


"아 진짜 짜증나네."


"언제까지 숨을 수는 없다며. 그럼 숨지 마."


"야, 이와짱... 제발..."


"나 씻으러 간다. 내일까지 대본 숙지 잘 해오세요, 간판 엠씨님."


대본만 한가득 안겨주고 이와이즈미는 복도를 뛰듯이 걸어 사라져 버렸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 역시 그의 정곡을 찔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가슴이 갑갑했다.


열려라, 하고 외치면 열리는 거였으면 좋겠네. 그 마음이라는 게. 


오이카와는 차가운 복도 벽에 기대 서서 잠시 머리에 오른 열을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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