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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HQ!!

[리에야쿠/야쿠른] 아홉 마디 꽃 01


*동양고전AU

*야쿠른 요소 포함









아홉 마디 꽃



w.비누꽃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부유한 제국인 묘나라 황궁의 아침은 늘 태양이 떠오른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궁인들의 비질 소리, 종종걸음치며 주인을 깨우는 궁녀들의 소리, 입궁하는 대신들이 두런두런 국사에 관해 논하는 소리가 끝없이 넓은 황궁의 구석구석에서 울리곤 했다. 일곱째 왕자인 열살 난 하이바 리에프의 하루는 이보다는 여유로웠다. 적통왕자인 태자는 이미 장성해 관례를 앞두고 있었고 제아무리 리에프 왕자가 후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거머쥔 촉비의 소생이라 하더라도 황상의 뜻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하여 아직 어린 왕자는 일각의 여유도 내주지 않는 지배자의 교육에서 종종 벗어나 여염집의 자식들처럼 공을 차며 놀곤 했다. 



그의 일생의 정인을 처음 만나게 된 그 가을날도 다르지 않았다. 리에프는 가죽을 꿰매어 만든 공을 공단신을 신은 발로 힘껏 차며 공이 굴러가는 길을 따라 달렸다. 태감과 보모 상궁이 따라오며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왕자는 총명하며 무예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귀한 이였으나 욕심을 갖기에는 아직 순진하고 맑은 아이였다. 따라서 권력 줄다리기의 양끝에 자신과 태자가 있음을 알지 못했고, 늘 그에게 거리를 두는 태자에게 서운해하면서도 다가감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니 뻥뻥 찬 공이 태자궁의 문턱을 넘어도 망설임 없이 공을 쫓아 달려들었다. 묵직한 공은 흙바닥을 굴러 마침 태자의 공부방인 보현각으로 향하던 어느 소년의 발치에 가 멈추었다.




"......왕자마마를 뵙습니다."




곧 몸을 틀어 단정히 포권하며 허리를 숙인 소년 앞으로 리에프가 다가섰다. 열 살에 이미 열네댓 살 아이들의 키를 뛰어넘은 왕자는 어렵지 않게 자신보다 조금 큰 소년과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궁인들이 정성스레 비질해 놓은 흙바닥은 말끔했으나 단풍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은 가을 바람을 타고 자꾸만 날아들었다. 왕자가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 아직 허리를 들지 못한 소년의 머리카락에도 그런 단풍잎이 달라붙었다. 리에프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털었다. 바삭거리는 낙엽이 손가락 안에서 부서졌다. 



첫 대면이었다. 입궁을 위해 관복을 차려입었으나 아직 관직은 없는지 소년이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마, 태자전하의 글공부 동무인 야쿠 모리스케 소공자입니다."




하얀 얼굴에 알맞게 자리한 작은 입술이 미소를 띠는 걸 보며 리에프는 멍하니 벌어진 입 밖으로 뜻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야쿠는 황궁의 백사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심상치 않은 왕자의 외모와 그 뒤로 따라붙은 태감과 궁녀들을 보고 어렵지 않게 그가 리에프임을 알 수 있었고, 인사를 마친 뒤에는 곧 미묘하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알아차린 것은 태감과 보모 상궁이었다. 




"마마, 어서 나가시지요. 태자궁에는 허락 없이 드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옆으로 바짝 다가와 속삭이는 태감을 한 손으로 밀어내며 리에프는 야쿠의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큼큼, 다듬어도 앳된 목소리가 야쿠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름만으로는 그대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소생은 황묘족으로, 나이는 열 다섯입니다. 아직 관례를 치르지 못하여 마마께 고할 호와 직위가 없사옵니다. 부디 용서하소서."




황묘족은 흑묘족과 함께 왕족인 백묘족의 도성 밖을 수호하는 민족으로, 야쿠 모리스케는 족장의 양자였다. 고급 귀족인데다 눈에 띄게 총명한 야쿠는 곧 황제의 눈에 들었고 태자의 글공부 동무가 되어 매일 입궁하고 있었다. 야쿠는 발치에 아직 놓인 공을 들어 태감에게 건넸다. 그를 지켜보던 리에프의 입술이 삐죽였다.




"태감! 나도 이 자와 같이 글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녹색 관복을 입은 야쿠의 손을 낚아채 붙들었다. 휙 눈을 들어 야쿠를 바라보는 리에프의 입매는 고집스럽게 다물어져 있었다. 손을 빼지도 못하고 당황한 야쿠 대신 태감이 쩔쩔매며 리에프를 말리기 시작했다.




"마마, 소공자는 태자궁에 속한 분이십니다. 제발 소인과 함께 사운궁으로 돌아가시지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야쿠가 문득 눈을 움직여 왕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은 리에프는 온 궁에 소문날 만큼 신비로운 광채를 빛내던 눈을 잔뜩 찡그린 채 울음을 참고 있었다. 왕자가 고작 열 살 어린애라는 사실을 떠올린 야쿠는 곧바로 리에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막 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품에서 꺼낸 명주 손수건으로 닦아 주며 그를 달랬다.




"황공하오나 소생은 보현각에 들어야 합니다. 마마, 부디..."


"......지금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이냐?"




동생을 얼르는 듯한 말투에 리에프는 그만 팩 성질을 부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보모 상궁이 어쩔 줄 모르며 다가와 왕자를 감싸안았고, 야쿠는 왕자가 귀여워 웃음을 감추며 일어섰다. 



왕자의 울음소리가 뜰을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곧 보현각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것은 나라의 2인자, 태자였다.




"모리스케. 왔으면 곧바로 들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키가 크고 마른 태자는 차분한 걸음으로 섬돌을 딛고 내려와 손수 야쿠를 끌어당겼다. 이복동생에게는 힐끗 차가운 눈길을 던졌을 뿐이었다. 




"태자전하...! 마마, 소생 물러갑니다."




급히 인사를 마친 야쿠는 태자의 손에 이끌려 보현각 안으로 사라졌다. 발을 떼지 않겠다고 울며 소리지르는 리에프를 들쳐업고 헐레벌떡 태자궁을 나서는 것은 태감의 몫이었다.



그 후로 리에프는 언제나 태감을 달달 볶으며 야쿠의 일거수 일투족을 물었다. 하얀 얼굴에 아담한 키를 가진 태자의 사람, 야쿠. 그 머리에 붙어 있던 이파리와 청명했던 가을 바람이 자꾸만 어린 왕자의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자고 일어날 때조차 그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촉비와 리에프가 머무는 사운궁에서 태자궁의 일을 캐내는 것은 태자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온 황궁의 궁녀와 태감들은 이미 소공자에게 칠왕자가 푹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리에프 왕자의 마음을 순수하고 귀엽게 여겼다. 형제들과 사이가 소원한 왕자가 형을 따르는 마음으로 야쿠를 쫓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궁녀들이 너그럽게 소근거리며 귀에서 귀로 전한 야쿠의 소식은 곧바로 리에프에게 세 끼 식사를 하듯 올려졌다. 태감의 말을 들으며 손에 쥔 붓의 끝을 질겅이던 리에프는 체통을 지키시라는 보모 상궁의 지적에 붓에서 입을 떼었다. 그리고 앉아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태자궁 앞의 정자로 가자."




태감은 아랫것을 시켜 검은 유약을 칠하고 다리에 자개를 박아 아름답게 장식한 왕자의 책상을  정자로 들어 옮길 수밖에 없었다. 리에프는 매일같이 야쿠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태자궁이 보이는 연못 앞의 정자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오전의 글공부를 하였다. 마마께도 곧 글공부 동무가 생길 것이옵니다. 보모 상궁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사실, 열 살의 왕자는 이미 보모 상궁의 말에 따르기에는 너무 자라 있었다.



우아한 보랏빛 비단옷을 펄럭이며 리에프는 야쿠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야쿠는 막 태자궁의 문을 나오던 참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타나는 리에프를 보고 야쿠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인형 같은 미모를 지닌 왕자는 분명 귀여웠다. 그러나 태자가 탐탁치 않아했으므로 야쿠는 리에프와 더 가까워질 수 없었다.




"소공자! 그대를 기다렸습니다."




예를 갖추는 야쿠를 직접 붙잡아 일으키며 리에프는 숨을 헐떡였다.




"부족한 소생에게 무슨 일이십니까, 마마."


"일은 무슨, 매일 같은 용무인 것을요. 어서 제 공부를 봐주시지요."




리에프는 조강 교육을 담당하는 학자가 물러가면 그 똑똑한 머리를 이용해 기상천외한 질문들을 꾸며내어 야쿠를 기다렸다. 자신이 조르면 야쿠가 잘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야쿠의 손을 잡고 정자까지 올라온 리에프는 미리 준비시킨 다과상을 들였다. 그리고 태자의 몸짓을 떠올리며 짐짓 점잖은 척 소매를 정리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금일은 석반을 함께 했으면 합니다."




리에프는 자신을 보는 야쿠가 언제나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이 싫었다.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면 못 이기고 웃어 주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왕자가 직접 집어 주는 약과를 두 손으로 받으며 대답하는 야쿠의 목소리는 전날보다 분명 냉정했다.




"황공하오나 마마, 소생은 앞으로 태자전하와의 글공부가 끝나면 곧바로 출궁해야 합니다."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의 태자는 오늘 처음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야쿠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네 살 위의 태자를 친형처럼 따르며 모시고 있었으므로 곧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태자는 야쿠의 손을 끌어당겨 일으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몸이 별로 좋지 않구나. 신경쓰이는 일은 없었으면 해, 모리스케. 그 사운궁의 어린애를 너무 가까이하지 말려무나.'


'송구합니다, 태자전하. 명심하겠나이다.'


'그만 일어나거라.'




그리고 태자는 잠시 말을 잊은 듯, 여전히 손에 잡혀 있는 야쿠의 손을 천천히 쓸었다. 곧 마르고 하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너는 나의 정인이지 않느냐. 누구든 다른 이에게 너를 내주지 말아라.'


'전하......'




태자의 조용한 목소리가 정자에 앉은 야쿠의 머릿속에 다시 들리는 듯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리에프 왕자로 인해 태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이만 물러가옵니다."


"고, 공자!"




정중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는 야쿠의 등 뒤로 리에프가 달려와 허리띠를 붙들고 늘어졌다. 야쿠가 가지 못하도록 허리를 껴안은 리에프는 곧 서러움을 터뜨렸다.




"야쿠 공자는 내가 그리도 싫은 겁니까? 가, 가지 마세요, 왕자의 명령입니다!"




엉엉 울며 소리치는 리에프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야쿠는 뒤돌아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소생에게는 이미 태자전하의 명이 내려져 있습니다. 마마께서도 곧 저보다 훌륭한 글공부 동무를 얻으실 것입니다. 보내주소서."




끝까지 웃어주지 않는 야쿠의 모습을 보며 리에프는 가까스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그쳤다. 비단옷 자락으로 눈물을 슥슥 닦은 왕자는 자리로 달려가 책상 밑에 숨겨두었던 사운궁의 구절초 꽃다발을 집어들었다. 소중한 귀족 여인에게 선물하듯 예를 갖춰 꽃다발을 내미는 리에프를 보며 야쿠는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해 어정쩡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리에프는 콧물을 크게 훌쩍인 다음 입을 열었다.




"...연모합니다, 야쿠 모리스케 공자."




그리고 리에프는 오랫동안 정자에서의 이 날을 떠올리며 마음 아파야 했다. 진심을 담은 자신의 마음을 외면한 야쿠의 목소리가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다.




'왕자마마... 저는 태자전하를 위해 입궁하는 사람입니다. 부디 그 말씀을 거두어주소서.'


'허나...'


'마마께서 조금 더 자라시면, 남녀간의 정에 대해 알게 되실 것입니다.'


'......'


'소생 물러가옵니다.'




리에프의 손에서 국화 다발이 툭 떨어졌다. 등을 돌려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며 야쿠는 리에프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다섯 살이나 어린, 말 그대로 어린애였다. 이렇게 진지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지나쳐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듯했다. 



그러나 야쿠의 이런 마음을 알 길 없는 리에프는 돌아선 뒷모습을 한참 동안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노려보며 서 있었다. 발치에 떨어진 꽃이 공단신에 짓이겨졌다.



태자는 그날 밤 갑작스레 각혈했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 누워 오랫동안 병석을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야쿠는 태자의 병문안을 위해 몇 번 입궁하였으나, 곧 태자궁에는 타인의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고 그 후로 리에프는 야쿠를 먼발치에서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리에프는 야쿠를 찾지도, 울지도 않았다. 왕자는 사운궁에 틀어박힌 채로 문무를 익히는 데에만 마음을 쏟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황궁의 참새들은 태자의 병으로 숨을 죽인 와중에도 사운궁이 제국의 2인자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을 재잘거렸다. 



그 상태로 여러 계절이 흘러갔다. 



야쿠가 다시 입궁한 것은 태자의 장례식 날이었다. 대전에서 황족으로서 의식을 마치고 나온 리에프는 삼 년 만에 다시 만나는 야쿠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야쿠는 그 날로부터 조금도 나이 먹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까칠해진 하얀 얼굴에는 슬픔이 내려앉았고 눈은 충혈된 채 눈물로 젖어 있었다. 리에프는 굳이 야쿠를 달래지 않았다. 그저 나지막하게 고하는 야쿠의 인사를 받고 그를 지나쳤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칠왕자 리에프는 제국의 태자로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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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의 꽃말은 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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