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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HQ!!

[다이스가] 라디오


* 씨엔블루의 Radio라는 노래에 맞춰 쓴 글입니다! 함께 들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스가른 전력 60분, 주제 '라디오'





라디오

사와무라 다이치 X 스가와라 코우시




w.비누꽃









한 차례 말다툼이 끝난 뒤 스가와라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 미열이 오르는 이마를 짚었다. 그가 앉아있는 방은 고급형 원룸이었다. 큰 침대를 놓고 침실처럼 쓰는 맨 안쪽 공간, 몇 걸음 더 걸어나오면 침대를 가리고 선 큰 책장과 책상, 또 두 사람의 옷이 빠짐없이 들어가는 붙박이장이 있는 공간, 그리고 현관 옆 아담한 식탁에 아일랜드 테이블까지 갖춘 주방이 있었다. 말이 원룸이지 웬만한 방 두칸짜리 집과 같은 평수에 그저 방만 따로 나뉘어있지 않을 뿐이었다. 이 집을 고른 것은 사와무라 다이치와 스가와라 코우시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잠시도 떨어지기 싫고,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각자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 꼴사납다는 이유로. 


스가와라의 손이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나무 라디오를 어루만졌다. 함께 고른 물건이었다, 이것도. 처음 동거를 시작했을 때도, 각종 기념일에도, 각자의 승진 소식을 전할 때도, 협탁에 심심치 않게 올려지는 와인잔과 함께 가요, 재즈, 팝을 가리지 않고 그때그때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들려준 게 이 라디오였다. 스가와라와 사와무라는 한 침대에 같은 이불로 몸을 감싸고 누워서 자주 DJ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루 일과를 나누곤 했다. 그런 기억들은 오래 전의 이야기도 아니었고, 아직 끝나버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바로 어제까지도 이어져 오던 일상이었다. 라디오가 이 자리에 있는게 당연한 것처럼 이 조그만 것을 보고 당연한 일상을 떠올리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루만지던 손은 자연스럽게 딸깍, 라디오를 틀었다. 늘 듣던 재즈 채널.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시의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서 있던 사와무라는 그 소리에 검은 창에 비치는 스가와라의 모습을 흘깃 바라보았다.


둘 다 지쳐있었다. 누구의 잘못 때문에 싸운 게 아니었다. 산다는 게 마냥 행복하고 너그러운 일만은 아니라, 한 개인인 이상 가까이 있는 누군가와 마찰을 빚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둘은 현실을 사는 연인이었다. 꿈에서만 살려 하지 않았기에 솔직하게 자신의 껍데기를 벗어 맞부딪치는 용기가 있었다. 그러니 이것도 애초에 다르게 태어난 서로를 조각조각 맞춰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마찰일 것이었다. 



"다이치, 미안해."



음악을 듣는 둘의 표정은 이미 풀어져 있었다. 그 중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스가와라였다.



"난 뭐가 그렇게 서운했을까. 함께 살아도 각자의 인생은 있는 건데. 너무 편해서 또 잊고 있었나봐, 네가 나랑 다른 사람인 걸."



사와무라는 등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조금 멋적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끔 우리가 이렇게 싸우고 헤어지면 참 허무하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의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는 걸까, 이미 모을 수도 없게 다 흩어져서 잃어버리겠구나 하고..."


"스가. 내가 미안해."



침대 곁으로 다가온 사와무라가 스가와라를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나도 네가 나와 다른 사람인 걸 잠깐 잊었던 것 같아. 그리고 이렇게 한번씩 부딪힐 때마다, 나도 덜컥 무서웠어. 우리가 다른 사람이구나, 언제든 떨어져 버릴 수 있는 거구나, 이런 생각 할 때마다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고. 그게 겁나서 더 억지로 맞추려고 내 감정만 강요한 것 같아, 미안해."



스가와라는 큭, 웃으며 사와무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재즈 가수의 목소리도 절정에 치닫고, 둘이 껴안고 있는 동안 음악은 끝나고 디제이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가까이 붙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내 버렸던 상처, 그렇게 아프게 긁혔던 공기는 걷히고 어느새 여느 날과 같은 저녁이 되어 있었다.



"근데 이 DJ는 이 방송 되게 오래한다, 그치."


"응. 우리 이 집 온 첫날 밤에도 짐정리 겨우 끝내고 누워서 들었지?"


"아, 그 때 이거 들었던 거 기억해?"


"당연하지. 잊고 사는 것 같아도, 다 기억나더라."



둘 다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이었지만 옷이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로 무너지듯 누웠다. 사와무라의 팔을 베고 누운 스가와라는 그의 얼굴을 올려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도 우리가 보낸 시간이 여기 있긴 한가봐. 나는 앞으로 어떻게 다 기억하나 싶었는데, 그 노래가 나오면 또 방금전 일처럼 생생하네. 다행이다... 나 좀 싫었어. 좋았던 건 하나도 잊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전부 담아둘 수도 없잖아."


"우리 싫었던 것도 잊지는 말자. 이제 이 사람 목소리 들으면 첫 날 밤 생각도 나고 오늘 밤 생각도 나겠지? 그래도 아무리 싫었어도, 오늘처럼 싸웠던 일까지 합쳐진 게 우리가 함께한 시간인 것 같아."


"야, 다이치... 나 솔직히 지금 기분 되게 좋아졌다? 우리가 맞춰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잖아. 근데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어져.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서 있는 대로 애쓰게 되고, 그러다 싸우고 나면 빨리 화해하고 싶어져. 싸우면 싸운 채로 관계를 끝내겠구나 하는 게 아니라, 너랑 계속 함께하고 싶어서 또 싸웠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어. 근데 나는 싸울때마다, 혹시 정말 혹시 나만 그런가 했지. 멍청이처럼."


"......나 지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것 같은데."


"어, 얼굴에 그렇다고 다 씌어 있네."


"마찬가지야... 하나도 변함 없이 사랑해. 우리 잊지 말고 버리지 말고, 지금처럼 쭉 같이 살자. 난 그게 평생이었으면 좋겠다. 진짜로, 진심으로."



스가와라는 대답 대신 누운 채로 왼손을 뻗어 사와무라의 왼손을 붙들었다. 같은 반지를 낀 두 손이 깍지를 끼고 단단하게 맞잡아졌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금 이 노래 듣는 날이 오면 

추억에 잠긴 채 웃을 거야

우리의 영원한 기억 속의 라디오

지나가는 변화들 속에서 

깨지지 않는 보석이 되어 반짝거려

우리의 뜨거웠던 라디오

둘만의 멈춘 시간 속에서 

빛 바래지 않는 사진 한 장 되어 반짝여

-Radio, CNBL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