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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HQ!!

[논커플링] 대륙전쟁기담: 서부에 침투하는 전쟁의 바람


*논커플링, 올캐러

*동서양고전판타지전쟁AU. 짬뽕.




대륙전쟁기담

-서부에 침투하는 전쟁의 바람




w.비누꽃











*서부 네코마 왕국




"왕실친군위대장 쿠로오 테츠로, 전하를 뵙습니다."


"앉아, 쿠로."



소년왕, 코즈메 켄마는 지도에서 아주 잠시 눈을 떼어 쿠로오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의 친위대장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정찰은 어땠어?"


"국경은 예상하신 대로 평화롭습니다. 공국은 언제나처럼,"


"둘이 있을 땐."



켄마는 앞뒤를 싹둑 잘라낸 말로 이어지려는 설명을 끊어버렸다. 쿠로오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금 더 편한 자세로 앉아 말을 이었다.



"전쟁은 재미있는 게임이 아니야, 켄마 전하. 흥미를 갖는 건 좋지만, 우리는 언제나처럼 방어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봐."


"공국은 이미 반란을 준비하고 있어. 그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제국은 반드시 우리 국경을 넘보게 될 거야. 평화롭다니, '전하'에게 거짓을 고하는 거야?"



켄마의 웃음 섞인 음성에도 쿠로오의 이마에 파인 주름은 그대로였다.



"우리나라의 방어는 무너진 적이 없어."


"카라스노 공국이 제국에 충성했을 때는 그랬겠지. 부엉이 숲의 힘 역시 약해졌어."


"전하,"


"아카아시에게 전갈을 보내. 그와 보쿠토의 얼굴을 봐야겠어."



켄마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의 어깨에 둘러진 긴 망토가 움직임을 따라 물결쳤다. 따라 일어서 등을 지키며 쿠로오는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후쿠로다니 왕국을 믿으십니까."


"......"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의 뿌리는 제국의 귀족, 귀족국가로서의 자존심이 우리 네코마와의 동맹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겁니다. 공동왕은 몰라도 그 아래의 수많은 귀족들이라면요."


"그들에게도 우리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어."



쿠로오도 켄마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북쪽으로는 까마귀 숲, 남쪽으로는 부엉이 숲에 둘러싸인 네코마와 후쿠로다니 왕국은 국경을 접한 신생 카라스노 공국 외에는 인접국가라고는 없었다. 카라스노가 건국되기 전에는 그저 황무지였던 땅은 누구도 마음에 두지 않았고, 평화를 깨기 싫어하는 두 왕국은 각자의 고고한 자존심을 지키며 관계를 유지해왔다. 네코마의 소년왕과 후쿠로다니의 공동왕 통치기에 들어선 지금은 그들간 친분 덕분에 역사상 가장 화평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쿠로, 나도 후쿠로다니를 믿지 않아. 하지만 공동왕은 괜찮을 거야."


"......"



이번에는 쿠로오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느새 돌아서서 꿰뚫을 듯 바라보는 켄마의 시선에, 그는 마침내는 그 얼굴을 외면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과한 걱정일 것이다, 내가 내 전하를 너무 어리게만 보는 것이겠지. 생각하며 쿠로오는 이어질 명령을 받기 위해 소년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럼 지금부터 무슨 명령 하실지 아니까요, 전하."


"응. 고마워, 쿠로."


"이건 정말로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켄마는 슬쩍 웃었다. 어깨까지 닿는 금발과 흑발이 섞인 오묘한 머리칼이, 그가 고개를 몇 번 가로젓자 그 뒤에 감추고 있던 새하얀 얼굴을 드러냈다. 



"나참, 반 년이나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부르더니, 전쟁놀이 준비나 하고 있었구만."


"중얼거리지 마, 쿠로. 없어 보여."


"있어 보이거든."


"없어 보여."


"있어."


"없어."



넓디 넓은 왕의 개인 침실에 두 명분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켄마는 곧 웃음을 그치고 황금색 눈을 내리깔았다. 그 눈과 마주친 쿠로오는 고개를 숙였다.



"고양이 신의 은신처인 축복받은 성지 네코마 왕국의 정당한 통치자 코즈메 켄마의 왕명으로 왕실친군위대장 쿠로오 테츠로를 네코마군 총사령관에 명한다. ...앞으로는 왕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의 백성들까지도 그대의 힘으로 지켜주기를 바란다."


"왕명을 받듭니다."



켄마는 부복한 쿠로오를 붙잡아 일으켰다. 연로한 네코마타 장군이 은퇴한 대장군의 자리를 이제 쿠로오가 이어받게 되었다. 근위대장보다 더 높은, 전쟁 중에는 명실상부히 왕국의 2인자인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그는 오로지 소년왕의 걱정으로 입안이 쓰게 말라갔다.



"전하, 그럼 친위대장의 자리는..."


"......"



켄마가 처음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슬쩍 눈치를 보는 금발머리를 내려다보며 쿠로오는 헛웃음을 지어버렸다.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 숙여 인사를 해 보인 그는 그대로 왕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왕은 걱정보다 상태가 좋아보였으니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쿠로오."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에 기대어 쿠로오를 기다리던 남자는 반가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다가왔다. 궁정마법사의 상징이 수놓인 새파란 비단옷 자락이 자그마한 남자의 발걸음을 따라 바닥에 쓸렸다. 쿠로오의 눈이 무심하게 야쿠를 훑었다.



"국경에서 이제 돌아온거야?"


"그렇게 입으니까 정말 대마법사님처럼 보이네. 수염도 붙이지 그래?"



날이 선 목소리에 야쿠가 멈칫했다. 그의 뺨이 확 붉어지는 걸 보면서도 쿠로오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야쿠가 멈춰선 틈을 타 쿠로오는 휘적휘적 걸으며 그의 옆을 지나쳤다.



"잠깐만, 쿠로오!"



멀어지려는 쿠로오를 따라 달리던 야쿠는 그를 붙잡는 순간 그만 긴 옷자락을 밟고 넘어져 버렸다. 야쿠를 다시 외면하려던 쿠로오는 곧 그의 팔을 아무렇게나 붙잡아 일으켜 주었다.



"미안해, 난... 그냥 친구로서 반가워서..."


"친구? 너와 내가 어딜 봐서 친구로 보여?"



야쿠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는 열여섯 살 이후로 신체의 성장이 멈춘 상태였다. 키도, 얼굴도 몸도 전부. 사람들은 그 나이에 이미 대마법사에 필적할 만큼의 마력이 폭주해버렸던 탓이라고 수군거리곤 했다. 하지만 쿠로오 너까지 꼭 그런 말을 해야 해? 야쿠는 원망을 최대한 삼키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 꼴이라서 미안하게 됐다."



그 말을 들은 쿠로오는 꽉 붙들고 있던 야쿠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불편한 상황에서는 꼭 나오는 버릇이었다.



"우리, 앞으로 잠시동안 거리를 좀 두자. 나는...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


"......"



오랜 친구인 야쿠의 눈을 마주하는 게 이렇게 힘들어질 줄은 몰랐다. 자신이 꼭 알아야만 하는 비밀을, 혼자서만 품고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그를 보며 쿠로오는 착잡함에 휩싸였다. 게다가 더는 성장하지 않는 친구. 그의 문제만을 신경써도 모자랄 시간에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다니. 비밀을 털어놓고 더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을 때까지, 더 냉정하게 쳐내야 했다.



"......아냐 나는, 사실 그때 그 말은 실수였어. 네가 국경으로 떠나기 전에, 나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야쿠는 필사적으로 아무 말이나 지어내려고 했다. 물론 쿠로오에게 절대 먹히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야쿠, 넌 정말. 그렇게 능력이 뛰어나고 일할 땐 빈틈도 없는 애가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굴어."


"......"


"앞으로 사적인 얘기는 최대한 자제하기로 합시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국정 얘기만으로도 눈코뜰새 없이 바빠지게 될 테니까요. 자세한 상황은 내일 국무회의 때 들으십시오. 리에프는 지금 어디 있죠?"


"......"


"야쿠 궁정대마법사님."


"리에프는... 훈련, 훈련장에 있습니다. ...대장님."



야쿠는 휙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쿠로오는 그런 그의 행동을 무시하며 돌아선 등에 대고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제부터는 국군 총사령관입니다. 미리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친군위대장은 이제 제가 아니라 하이바 리에프 대장이 맡을 겁니다. 조금 걱정되기는 해도 그만한 사람이 없으니까요. 마법사님도 부디... 그를 잘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야쿠는 쿠로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뛰어가 버렸다. 쿠로오는 리에프를 찾아 훈련장으로 내려가며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












*서부 후쿠로다니 연합왕국




"보쿠토 전하, 아카아시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시오."


"코즈메 전하께서 후쿠로다니의 공동왕께 보내는 전갈입니다."



네코마의 전령은 부복했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붉은 인장이 찍힌 두루마리를 공손히 내밀었다. 대내관이 그것을 받아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왕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오른쪽 왕좌에서 일어난 젊은 왕이 아주 귀찮아하는 몸짓으로 계단을 내려와 두루마리를 받아들었다. 이리저리 뻗치도록 매만진 머리에 얹힌 고상한 보석 관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보나마나 쿠로오가 썼겠지..."



돌아서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전령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왼쪽 왕좌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다른 왕이 낮게 책망했다. 두루마리를 열어 보는 왕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보쿠토 전하, 네코마 사신의 앞입니다."


"미안, 아카아시 전하."



검은 곱슬머리에 역시 왕관을 쓴 아카아시는 한숨을 쉬며 보쿠토가 건네주는 전갈을 받아 읽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공동왕이 서신의 내용에 동의했다고 그대의 왕께 전하시오. 그리고 먼길 오느라 노고가 많았으니 여독을 풀고 돌아가도록 하시오."



아카아시의 말에 꾸벅 절을 해보인 전령은 대내관의 안내를 받아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짐작하셨습니까?"


"뭐, 켄마가 원하는 대로 해 주자고."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보쿠토 전하."



아카아시 왕은 두 번째로 한숨을 쉬었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작에 다른 수를 쓰지 못했던 게 잘못이었다. 전쟁을 향한 기대감이 흘러 넘치는 보쿠토의 눈빛을 보자 머리가 아파왔다. 아카아시는 감은 눈을 꾹꾹 누르며 평화롭던 숲 너머 서부국가까지 찾아드는 전쟁의 기운을 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