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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HQ!!

[논커플링] 대륙전쟁기담: 카라스노의 무녀와 남국왕

*논커플링, 올캐러

*동서양고전판타지전쟁AU. 짬뽕.








대륙전쟁기담

-카라스노의 무녀와 남국왕




w.비누꽃










'제국에서 쫓겨나 숨어 살던 저희 일족을 구해주신 카라스노 공국의 은혜는 살과 심장을 바쳐 갚아도 모자랄 것, 이 시미즈 키요코는 대공의 것입니다. 미력한 능력이나마 바치오니 부디 하명하소서.'




제국은 무녀와 그 일족을 학살하거나 추방했다. 본래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은 쉽게 발현하지 않으나 무녀들의 요술력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흑요술을 부리거나 불필요한 살생을 저지르는 것은 그들만의 철저한 금기였으나 대륙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녀로 내림받은 시미즈는 카라스노 공국을 위해 스스로 하나의 병력이 되었다.



"하나의 국가에 기생하는 무녀라니. 네게는 무녀로서의 긍지도 없느냐?"


"목숨이 없으면 긍지도 없는 것이오. 하찮은 나의 긍지를 위해 우리 일족이 죽는 것이 옳은가?"



시미즈는 그늘에서 발을 내디뎠다. 드러난 얼굴을 마주한 테루시마 왕은 숨기지 않고 입맛을 다셨다.



"너희 무녀들이란 본디 말재주와 외양으로 사람을 현혹한다더니 정말이구나." 


"나는 남국왕을 현혹한 적이 없소."



수려한 외모의 청년왕은 가벼운 동작으로 말을 더 가까이 몰아왔다. 대륙에서 가장 더운 남국답게 짧게 제작된 황색 갑주를 입고 드러난 팔다리에는 단단한 보호대를 두른 왕의 머리칼은 남쪽 해변의 금모래빛이었다. 그는 아이처럼 반짝이는, 동시에 욕망으로 번뜩이는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시미즈의 검은 머리칼을 훑었다.



"내 오늘 반드시 너를 잡아 내 밑에서 울게 해주마. 목숨이 없으면 긍지도 없다고? 목숨이 있어도 긍지가 없는 게 얼마나 비참한 생인지, 이 내가 직접 깨닫게 해주지."


"공국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몸, 내 목숨은 공국의 것이오. 따라서 나의 명예 역시 카라스노에 속했으니 그대가 짓밟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테루시마는 웃으며 칼을 빼들었다. 시미즈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가만히 서서 말을 이었다.



"이 이상 전진한다면 나는 국경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겁니다. 그러니 남국의 왕은 마음을 접고 돌아가시오."


"내가 국경을 넘는 것이 무슨 마음인 줄 알고 접으라 하며 쫓아내느냐?"


"공국은 제국과 일촉즉발의 상황에 있소. 제국령인 죠젠지의 왕을 받아들이리라 보시오?"


"무녀는 세월을 받을수록 현인에 가까워진다는데, 넌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구나."



테루시마는 말에서 가뿐히 뛰어내려 시미즈에게로 걸어갔다. 그가 눈앞까지 다가서도, 칼끝으로 턱을 치켜드는 행위에도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흑요석처럼 요요히 빛나는 눈동자를 잠시동안 마주하던 테루시마는 곧 칼을 집어넣었다.




"재미없군."



그는 순식간에 따분해진 얼굴을 하며 팔짱을 끼고 섰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키요코의 옷자락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 그는 성의없는 손짓 한 번으로 뒤따라온 호위를 전부 말에서 내리게 했다.



"근위병 열둘 외에 다른 병사는 없다. 전령을 보내지 않은 건 실례인줄 알고 있으나 그저 유희를 위해서였을 뿐, 전쟁을 앞둔 나라의 경비란 이렇게 삭막하고 재미 없는 것이군. 죠젠지는 황제의 야욕에는 관심이 없으니 나를 사와무라 대공에게 안내하라."


"대공께 여쭈어야 하니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이 이상 내게 무례를 범한다면 정말로 살려두지 않겠다."


"마음대로."


"농담이다. 정말이지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는 여인이로구나."



그 때, 까마귀 숲의 언저리를 뚫고 두 개의 인영이 솟아올랐다. 카라스노의 소년 자객들이었다. 그들은 착지하자마자 곧장 시미즈의 앞으로 달려와 그녀를 보호하며 테루시마 왕과 대치했다.



"무녀님. 괜찮으십니까?"



윤기나는 검은 머리칼을 가진 늘씬한 소년이 나이답지 않은 싸늘한 눈빛으로 정면을 쏘아보며 등 뒤의 시미즈에게 물었다. 시미즈의 얼굴에 처음으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카게야마 님. 저는 괜찮을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그래도... 아, 물론 스가와라 공작께 허락은 받았습니다!"



불타는 듯한 주홍빛 머리카락의 작은 소년, 히나타가 시미즈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대신 대답했다.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온통 검은 천으로 지은 무복을 입고 가죽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각자 오른손에 빠듯하게 쥔 네 개의 수리검이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번쩍였다. 



"경계를 풀어도 됩니다. 남국왕은 궁으로 모실 것이니 대공께 까마귀를 보내 주세요."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잠시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곧 히나타의 어깨에 올라앉아 있던 커다란 까마귀가 푸드득 날아올라 숲 너머로 사라졌다. 이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서 있던 청년왕은 지겨운 듯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날 언제까지 여기 세워둘 셈이지? 소꿉장난이 끝났으면 나를 그만 안내해라."


"죠젠지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소서. 까마귀 숲에서는 반드시 저희의 뒤만 따라오셔야 합니다."



카게야마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 뒤 숲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섰다. 테루시마는 다시 말에 올라타 고삐를 잡았다. 드디어 까마귀 숲으로의 입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