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HQ!!

[쿠로야쿠] 여름비

*회사원X회사원 AU




여름비

쿠로오 테츠로 X 야쿠 모리스케



w.비누꽃





스탠드만 켜 둔 어둑어둑한 방에 드러누웠다. 넥타이도 푸르지 않은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빗소리를 들었다. 이런 날에는 꼭 스스로 바닥까지 파고들게 된다. 옆으로 몸을 웅크렸다. 비가 오는 밤이든 무더워 잠도 자기 힘든 밤이든 내 옆에 함께 누워 안아주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 참 이상하다. 그때는 그렇게 낭만적이고 평온하게만, 무슨 음악처럼 들렸던 빗소리가 지금은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때려서, 창문을 꽉 닫아도 찬 빗방울이 들이쳐 날 매섭게 적시는 것 같아서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양손으로 귀를 막고 얼굴을 베개에 묻어도 그의 얼굴은 자꾸만 머릿속에 그려졌다. 제발 아무 생각 없이 잠에 빠지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핸드폰을 들어 아직 익숙하게 기억하는 번호를 눌러버릴 것 같아서.





"야쿠 씨, 어디 아파요?"

"아뇨. 괜찮습니다."


새벽까지 잠 못 이룬 얼굴이 보기 좋을 리 없었다. 나는 까칠해진 얼굴에 애써 미소를 띄우며 일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쿠로오 씨, 안녕하세요."


등 뒤로 이제 막 출근한 그가 지나간다. 그와 함께 들어온 바깥의 비 냄새가 내 코까지 훅 끼쳐 왔다. 쿠로오 씨에게 인사하지 않는 나를 동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오늘도 딴청을 피운다. 갑자기 서랍을 열어 중요한 문서를 찾는 시늉을 한다던가 하는. 그러다 문득 자조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는 별다른 말없이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내가 지금 세상에서 가장 후회하고 있는 일, 다른 회사도 다른 부서도 아니고 같은 부서의 바로 옆 책상을 쓰는 남자와 연인이었다는 사실. 나는 그를 미치도록 의식하고 있다.


출근 시간이 지나자 어수선하던 사무실 분위기도 조용하게 정돈되었다. 창 밖에 아직도 내리는 빗소리가 들려올 만큼.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섞이는 그 소리 때문에 나는 가끔씩 창문을 흘깃거렸다. 그게 쿠로오 씨가 앉은 방향이어서일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을 즐기는 감성적인 남자인 척 하면서, 시선 안에 걸리는 그를 볼 수 있어서. 


"야쿠 씨."

"......예?"


애써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하려 하는데 옆에서 그가 말을 걸어 왔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그새 낯설어졌나보다. 내 망상인지 현실인지 잠시 얼떨떨해서 대답도 늦었다. 쿠로오 씨는 내가 대답하며 그 쪽을 바라볼 때까지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듣고도 키보드를 치다가 느릿느릿하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많이 오죠."


내게 말을 거는 게 어렵지 않은가보다. 평소처럼 덤덤한, 감정이 한 자락도 묻어나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잠 못 이뤘던 지난 밤을 떠올렸다. 내가 몸부림치는 동안 그는 혼자서도 잘 잤으려나? 내가 전화를 걸까 말까 수십 번 수백 번을 망설이는 동안 그는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했으려나? 왜 아무렇지 않게 시덥잖은 날씨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그럴거면 좀 나를 생각했다는 표정이라도 짓든가. 나는 조금 많이 속상해졌다.


"뭐, 비가 많이 올 때긴 하죠."


애써 꾸며낸 심드렁한 표정으로 최대한 관심 없다는 듯이 대꾸해주었다. 내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자 나를 바라보던 쿠로오 씨도 그냥 다시 일을 시작했다. 열 받는다. 매일 얼굴을 맞대는 것도 내가 그를 잊는 데 하나도 도움되지 않는데, 거기다 이렇게 한 번씩 꼭 나를 휘젓는다. 어쩌면 그는 나와 사귀는 것보다 이런 정도가 재미있는 걸지도 모른다. 정립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 나라는 사람을 휘둘러 보는 재미.


"비올 땐 청하에 생선구이가 딱인데. 일 끝나고 한잔 할래요?"


그가 다시 말을 꺼내는 동안 우리는 둘 다 앞만 보고 앉아있었다. 내 손은 키보드를 누르고 있었지만 모니터에 나타나는 글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모니터에 붙은 포스트잇을 잡아뜯었다. 여기서 거절하지 못할 나 자신을 이미 알고 있어서. 나는 헤어진 연인과의 기싸움에서 또 졌다. 하긴 한 번 이겨본 적도 없었다. 내 손으로는 이 관계를 깨끗이 청산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아직 내게 남은 미련이 너무 컸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다. 나는 좋을 대로 나를 흔들고 간 남자를 아직도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자꾸만 파먹고 망가뜨리는 그에게 알면서도 팔을 벌려주었다.



작은 술병을 다 비우는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흘러갔다. 쿠로오 씨와 나, 누구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으니까. 술과 함께 시킨 요리가 생선구이건, 야채볶음이건, 꼬치구이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일 하느라 텅 빈 배를 채우고 술기운을 빌리기 위해 빠르게 잔을 비웠다. 물론 술기운을 빌리는 건 나 혼자였다.





스탠드만 켜 둔 어둑어둑한 방에 그와 엉켜 누웠다. 넥타이가 풀어지고, 셔츠가 풀어지고 나는 그렇게 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제처럼 빗방울이 창문을 때렸다. 그 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나는 신음을 질렀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있을 때 나를 아프게 때리던 빗소리는 둘이 된 지금에도 똑같이 나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어떻게 해도 이전처럼 행복하게 들리지 않아서 나는 그냥 그 소리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어떤 것이 더 나았을까? 오늘 밤도 혼자 외로움과 상실감과 밀려오는 추억에 웅크리고 괴로워 하는 것, 아니면 내가 좋아하지만 나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 몸을 섞으며 마음을 괴롭히는 것. 나도 그처럼 가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야쿠 씨, 지금 딴생각 했지."


그는 내 몸을 잘 알고 있다. 곧바로 내가 가장 느끼는 곳을 만지고 찔러 온다. 나는 땀과 눈물을 짜내며 웃고 입을 맞췄다. 그는 내 마음도 잘 알고 있다. 청승맞게 눈썹을 찡그리고 입술을 떨면서 울음을 터뜨릴까봐 얼굴을 숨기고 싶은 마음을. 절대 아는 척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 미안하다고 해야 하고 더이상 나를 좋을 대로 안을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는 눈을 감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키스해 주었다. 나도 모르는 척 그의 목에 더 세게 매달리며 점점 더 빨라지는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귀를 막을 수가 없어 숨을 거칠게 쉬어도 빗소리는 점점 더 크게 내 귀를 헤집어 놓았다. 

쿠로오 씨... 나는 결국 그의 이름을 불러 빗소리를 지웠다. 습하고 비릿한 냄새가 비냄새를 대신한다. 그렇게 또 잠들지 못하는 하룻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