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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쩜디

[하정우X임시완] 암살 스핀오프 2

암살 스핀오프 1

하정우X임시완

카와구치 슌스케의 여동생이 미츠코인 내맘대로 설정


w.비누꽃







미츠코는 나와 마주치기도 전에 슌스케에 의해 동경의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결혼식 전에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나카 소위는 또 나를 들어 안고 손님방이 아닌 슌스케의 방에 내려놓았다. 나는 줄곧 그를 보며 품었던 의문을 한 번 풀어보기로 했다.


"다나카 소위님."


내가 침대에 늘어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돌아가려던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조선말을 하십니까."


내가 묻자 그는 조선말로 네, 하고 대답했다.


"출신이 어디신가요?"

"상해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신 겁니까? 부모님은요?"

"부모님은 두 분 다 일본인이고 저는 상해에서 태어나 그곳 무관학교를 나왔습니다."

"상해에 주둔한 일본해군의 나카무라 소위님은 안녕하신지..."

"잘 있습니다."

"제 이름은 기억하십니까?"


이어지는 질문에 유창한 조선말로 막힘없이 대답하던 그가 처음으로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를 바라보던 그는 앉으라는 내 손짓을 보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임시완."

"당신 조선인이군."


그가 미소를 지었다. 놀랍도록 여유롭고 당당한 웃음이었다.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맞아, 도련님. 난 조선인이다."

"......당신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해?"


내가 미처 눕혔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는 순식간에 내 등을 타고 올라와 나를 결박했다. 베개에 한쪽 뺨이 짓눌리고 관자놀이에 차가운 금속이 닿아있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의도한 대로 상해에는 나카무라 소위 따위는 없을 거다. 그리고 일본인이 네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아니, 애초에 내가 조선말을 정말 조선인처럼 하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웠어야 했어."

"당신 누구야."

"하와이 피스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뢰를 받고 경성에 왔다."

"왜, 왜 슌스케의 호위를 맡은 건데? 그리고 왜 나한테 말해주는건데?"


그는 기분 좋게 웃었다. 눈이 휘어지는 웃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총구를 들이댄 상황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그는 편하게 내 등에 앉았다.


"그의 옆에 있으면 상황을 봐서 암살하기 쉬워지니까. 그리고, 내가 받은 목록에 네 이름도 있으니까. 지금 너를 쏠 거니까."


나는 결박당한 머리를 들어올리려고 버둥거렸다. 그는 너무 쉽게 내 머리를 한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이상하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에도 그의 손에서 나는 담배 냄새가 맡아졌다.


"나는 지금 죽으면 안 돼."


나는 간신히 속삭였다. 아무리 좋게 들어주려 해도 목숨 구걸로밖에는 안 들리는 말이었다.


"왜."

"당신이 받은 리스트에 우리 아버지가 있어?"

"네가 있는데 너희 아버지가 없겠냐."


그가 나에게 솔직한 만큼 나도 솔직해지기로 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 몫이야."


머리를 누르던 손의 힘이 조금 약해졌다. 나는 드디어 곁눈질이 아니라 그를 완전히 마주볼 만큼 머리를 돌릴 수 있었다.


"아버지를... 끝내는 건... 내가 할 거야. 임시정부한테도 넘길 수 없어..."

"왜."


말이 나오려다가 목에서 걸려버렸다. 울컥하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울음을 눌러 참으며 숨을 몰아쉬는 나를 그는 기다려주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으니까. 독립운동하던 어머니를 죽였으니까, 그리고 나라를 팔아넘겼으니까. 나 역시 속죄해야 하니까. 남의 손에 맡기면 안 돼."


울먹이는 목소리가 될까봐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헐떡이는 내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그는 아무것도 못 본 사람처럼 무표정했다.


"지금까지 안 죽이고 뭐했어?"

"기다렸어. 내가 성장해서, 아버지에게 화려하고 비참한 죽음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어느 날 밤 침대에서 조용히 죽는 건 아버지에게 어울리지 않아. 모두가 봐야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라를 팔아먹고 부인을 죽인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목숨이 끊어지는게 아버지에게 맞는 죽음이야."


나는 이제 눈도 깜박이지 않고 연극 대사를 외우듯 말을 줄줄 이었다. 수년간 혼자서만 마음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던 말을 처음 입밖으로 내는 순간이었다. 말을 끝내자 분노와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하와이 피스톨은 내 머리에서 손을 뗐다.


"나라 판 돈으로 잘 먹고 잘 자고, 동경에서 유학까지 하면서 기다렸단 말이지."

"......"

"나약한 도련님치곤 괜찮은 얘기였다."

"......알아. 나도 나한테 죄가 있다는 거 알아. 그래도 내 결혼식때까지만 기다려줘."

"기다리면?"

"그 날이 아버지에게는 더 큰 권력을 가져다 줄 행복한 날이겠지. 총독부에서도 꽤 급 있는 사람들까지 다 모일거야. 그리고 난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쏠 거고."

"볼만하겠구만."

"우리 아버지의 목에 얼마의 의뢰비가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마련할게. 그러니까 그 날 까지만 기다려줘."


하와이 피스톨은 내 머리에 아직까지 겨누고 있던 총을 거둬들였다. 그의 품 안으로 총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결혼식장은 아수라장이 될 거고... 당신 말대로 나는 나약한 도련님이라 죽는 게 무서울지도 몰라. 그 때 나를 죽여. 그럼 의뢰비도 받을 수 있잖아."


그가 나를 응시했다.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이상하게 귀가 달아올랐다. 


"나는 애국심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뜬금없이 꺼낸 말이 이상하게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근데 도련님이 내 일을 망치는 건 곤란해."

"안 망쳐...!"


하와이 피스톨이 결박을 풀어주자 나는 튕기듯 일어나 앉았다. 그의 시선이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내 무릎으로 향했다. 도자기 조각들에 찔려 엉망이 된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있었다. 시선이 닿자 피가 배어나오는 상처가 갑자기 따갑고 쓰라려 오는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 무릎을 가렸다.


"개미새끼 하나 죽일 능력도 안 돼 보이잖아. 네 꼴을 좀 봐."


그는 그냥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아마도 뺨이 부어있을 게 생각나 고개를 돌렸다. 하와이 피스톨이 소리내 웃자 그가 내뱉은 숨이 얼굴에 와 닿았다. 이상하게 따끔거렸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르쳐 줄까?"

"뭘?"

"사람 죽이는 법."

"......나도 알아."

"아니야. 넌 몰라. 네 친아버지, 네 친구인 카와구치 대위, 그리고 함께 피를 뿌리게 될 주변 사람들을 죽인다는 게 어떤 건지."


그의 말이 전부 맞았다. 나는 모른다. 그냥 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맘 속 깊숙이 분노를 쌓으며 살아왔을 뿐. 모든 걸 체념한 듯 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아 인형처럼 웃고 있었고 결혼식 날 죽을 생각을 했다.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판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나 자신에 환멸을 느꼈지만 그 역시 침대에 누워 눈물을 글썽이면 끝나는 자기연민이었을 뿐, 한번도 가진 것을 내려놓은 적 없었고 내 의지가 아닌 척, 밀어냈던 척 했지만 부정할 수 없이 내 오랜 친구였던 슌스케와 그 집안을 함께 지옥으로 데려갈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나는 태어날 때 태엽이 끝까지 감겨져 영혼 없이 앞으로만 걸어가는 목각인형처럼 살아왔다. 뜨거운 피를 흘리는 게 어떤 고통인지 모른다.


"네가 그들을 죽이고 나에게 목숨도 내놓을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


그냥 입을 다물고 멍하니 얼굴을 마주했다.


"네 꼴은 암살자로는 형편없지만 내가 필요한 걸 얻기엔 제격일 것 같고."


어쨌든 쓸모가 있어 보인다니 다행이다.


"카와구치 대위가 돌아오면 내가 네 곁에 있도록 해봐. 그리고 카와구치 가와 총독부에 대해 네가 아는 걸 전부 내게 말해. 그럼 네 소원대로 결혼식 날 너를 죽여주겠다."


그는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 제복부터 그의 품 안으로 사라진 권총과 드러난 널찍한 이마, 넘겨진 검은 머리칼, 짙은 눈썹, 나른한 듯 하지만 강렬한 눈빛, 진한 담배 냄새와 낮은 목소리까지 내 머릿속에 섞여들어와 왕왕 울렸다. 그를 보고있으면 멍하니 넋을 놓게 된다. 그는 나같은 애송이와는 다른 진짜 어른이었다. 지독하게 남성다웠다. 


"하와이 피스톨."

"말해."

"진짜 이름을 알려줘."


조금 놀란 듯 그의 눈이 커졌다. 나는 나를 죽이겠다고 말하는 남자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그것은 이미 체념해 버린 내 삶에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호기심이었다. 아마 그가 이 지겨운 삶을 끝내줄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마지막 날은 이제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타인에 의해 정해졌으니 나는 짧은 인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그에 대해 궁금해졌다.


"네 몰골이 왜 그꼴인지 알려주면."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는 내가 대답하지 못할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혀 궁금한 표정이 아니었다. 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거리낄 것이 없는데, 다 포기했는데, 그래도 그 앞에서 이 치부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양손에 얼굴을 묻어도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내 방에서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고 나는 무너졌다. 자기연민에 술처럼 취해 모든 감각이 무뎌졌던 나는 사실 무서웠던 거다. 찢어진 무릎도 아팠고 슌스케가 나를 때릴 때마다 아프고 무서웠다. 그리고 그가 나를 만질 때도 나는 사실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견딜 수 없이 아팠다. 몸이 덜덜 떨려 몸을 웅크렸다.


"도련님. 이 조선 땅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어."


그는 내게 허리를 숙여 아주 짧게 내 머리칼을 쓸었다. 그리고 내가 혼자 마음껏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나를 두고 나갔다. 눈을 꾹 감은 채 눈물로 범벅이 돼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더 단단히 감싸며, 나는 나를 덮쳐오는 피로가 불러온 잠의 파도 속에서 그가 내 귀에 속삭인 이름을 되뇌었다. 하정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맞은편 원형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던 슌스케는 내가 낸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아까처럼 다시 무서워졌지만 애써 태연하게 일어나 앉았다. 슌스케가 말없이 손짓했다. 겨우 일어나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서 씻어. 너 씻지도 않고 자더라. 저녁 먹으러 나갈거야."


슌스케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갈아입을 옷이 놓여있었다. 갑자기 씻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인이 받아준 더운물을 마다하고 찬물을 끼얹었다. 부은 얼굴과 욱신거리는 몸이 식는 느낌이었다. 무릎에 잔뜩 말라붙은 핏방울이 씻겨 내려갔다. 도자기 파편이 박혀들어간 곳은 없었지만 꽤 찢어져서 한동안 고생할 듯 싶었다. 목욕탕 한켠에 놓인 연고와 붕대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슌스케가 원하는 대로 약을 바르고 그가 준비한 기모노를 입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것도.









"오래 기다렸나?"


자주 다니던 고급 요정의 방으로 들어서며 슌스케는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다나카 소위님..."

"자주 뵙네요."


제복을 벗고 양복을 입은 하정우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조심해서 말을 선택했다. 요리가 나오고 슌스케의 옆에 앉아 술이 약한 그에게 연신 술을 따라 주었다. 그는 술을 마시며 옆눈으로 나를 자주 내려다보았다. 내 행동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허물없는 친구였을 때도 그는 내가 옆에 앉아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잔을 비우는 만큼 나도 잔을 비워야 했다. 나 역시 술을 잘 마시지 못해 금방 어질어질해졌지만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앞에 앉은 하와이 피스톨은 술잔을 연거푸 비우면서도 멀쩡한 얼굴로 교묘하게 정체가 들키지 않을 만큼의 얕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슌스케."

"말해."

"나한테 항상 붙어있을 경호가 필요하다고 했었잖아... 매일 따라다니는 군인들 말고."

"그랬었지. 근데 네가 별로 안 좋아했잖아. 왜?"


슌스케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그가 두 손가락으로 잡고 흔들거리던 술잔을 내려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다나카 소위님이 해주셨으면 하는데. 따, 딱 한 달 정도면 되니까. 상해 얘기도 듣고싶고..."


나는 무엇이든 슌스케에게 부탁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많이 놀란 듯 했다. 그리고 다나카 소위를 돌아보자 그 역시 놀란 표정을 짓고 웃고 있었다. 그는 태연히 연기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계획됐던 일이었고 계속 마음을 다잡은 뒤 꺼낸 말이었지만 긴장으로 몸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술의 힘을 더 빌리려고 잔을 들이켰다.


"모처럼의 휴가를 나온 다나카 소위에게 실례야. 내가 부탁한 것도 사실 경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경시켜 주려고 했던게 크고."

"너는 바쁘잖아... 결혼식은 한 달 안에 있을거고 오히려 내가 더 경성에 돌아다닐 일이 많을텐데... 그리고 한 달 뒤에는 다나카 소위님은 상해로 돌아가시겠지."

"......"

"사실 내가 다닐 때마다 군인들 여럿이 따라다니는 것 때문에 눈에 띄어서, 위험했던 적도 있고."

"그랬어?"

"내가 나이가 어려서 사람들이 해코지하지 못하게 붙어다닐 사복 경호원이 필요하다고 했었지.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슌스케는 잔을 내려놓고 술 때문에 빨개진 내 얼굴을 쓸었다. 나는 살짝 피하며 하와이 피스톨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너무 무례했나요."

"아닙니다. 상해에 딱 도련님 나이의 남동생이 있는데, 그애 생각이 많이 나네요."


참인지 거짓말인지 모를 말을 하며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슌스케는 나와 그를 번갈아 탐색하듯 쳐다보았다. 내게 시선을 돌릴 때 나는 슌스케의 눈에서 자기의 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수컷의 경계심을 읽었다. 하정우는 오늘 한번도 슌스케의 앞에서 내게 관심을 보이거나 먼저 말걸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얼마 남지 않은 결혼식과, 상해로 돌아갈 그의 상황, 그리고 슌스케가 했던 말만을 꺼내며 그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했다. 그러니 괜찮을 거다.


"이 애는... 어릴적 같은 소학교에서부터 봐온 친구지만 나보다 몇 살이나 어려서 동생처럼 걱정되는게 사실이야. 그런데 소위에게 너무 폐일까 걱정이군."


허락이다.


"전혀 아닙니다. 저 역시 경성에 연고도 없고 무료한 차에 잘 된 일이지요."


하와이 피스톨은 웃으며 슌스케의 잔에 술을 채웠다.


"결혼식 때 까지만 부탁해, 그럼."

"감사합니다, 소위님."


나는 그제야 살짝 마음이 놓여 하와이 피스톨을 바라보며 웃었다. 술을 먹은 탓에 얼굴의 근육이 마음대로 쭉쭉 늘어나는 것 같았다. 바람 새는 것 같은 내 웃음소리를 듣고 슌스케는 웃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세게 당겨 끌어안았다.


"어?"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으니 특별히 소위에게만 말하지. 결혼이야 형식적인 거고,"

"슌스케!"

"입 다물어. 조선인 치고 귀한 집 자제이기도 하지만, 사실 밤에는 내 시중도 들고 있으니까 더 잘 부탁하네."


그가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앞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외면해버린 내 고개를 슌스케가 손으로 잡아 올렸다.


"이런 얼굴을 하고 조선인으로 태어났다니 아까워. 뭐, 나한텐 다행인가."


그리고 순간 날카로운 눈으로 그가 앉은 쪽을 바라보았다. 하와이 피스톨은 그냥 네, 하고 웃기만 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점이 더욱 슌스케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술이 찰랑대는 잔을 들어 내 입에 가져다댔다. 가슴팍에 안기다시피 해서 술을 받아마시는 내 모습이 요정의 기생이라도 된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기생보다 떳떳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또 나를 체념하게 했다. 입안으로 밀려드는 술을 다 받아 넘기지 못하고 입술 옆으로 흘렸다. 기모노 자락으로 아무렇게나 술을 훔치며 하와이 피스톨을 곁눈질했다. 내게 술을 먹이고 기분 좋게 음식을 집는 슌스케를 피해 우리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무심했다.






슌스케는 자신을 부축하러 다가오는 군인들을 물리고 혼자 비틀비틀 걸어 차에 올라탔다. 그의 옆은 내 자리였다. 하정우는 자신이 묵는 여관으로 가겠다고 말했지만 술에 잔뜩 취해 점점 더 기분이 좋아진 슌스케는 그에게 오늘 밤부터 당장 자신의 집에 머무르라고 했다. 슌스케의 신뢰를 이만큼 얻었으니 그의 암살 작전은 아주 잘 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기로 한 나의 계획도. 그런데도 비참한 기분이라니.


차에 올라타기 위해 나도 애써 몸을 가누며 걸어갔다. 그러다 순간 어지러워 무릎이 탁 꺾였다. 안 그래도 찢겨져 아픈 무릎을 또 바닥에 처박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얼굴이 땅과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양쪽 어깨를 큰 손이 붙들었다.  


손이... 뜨거웠다.

하와이 피스톨은 말없이 나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그리고 앞자리에 올라탔다. 그의 손이 닿았던 부분이 계속 신경쓰였다. 







그럼 잘 쉬라며 기분 좋게 소리치는 슌스케의 방 앞에서 나와 하정우는 돌아섰다. 내가 이 집에서 항상 쓰는 방의 옆 방을 이제 그가 사용할 것이다. 술을 먹어 또렷하지 않은 시야로 계속 그를 곁눈질했다. 


"넌 이리 와..."


앞서 가는 그의 뒤를 따라가려던 내 허리를 뒤에서 잡아챈 건 방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내 옛 친구였다. 하와이 피스톨은 슌스케에게 이끌려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잠시 돌아보았다. 나는 그와 차라리 눈이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슌스케는 내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으며 나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내가 그보다 더 술에 취해 있었다. 몸도 마음도 가누기가 힘들어서 흑, 하고 나도 모르게 어린애처럼 울음소리를 뱉었지만 곧 그 소리도 먹혀들어갔다.


순간 나는 지금 나를 짓누르는 사람이 하와이 피스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