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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쩜디

[하정우X임시완] 암살 스핀오프 1

암살 스핀오프 1

하정우X임시완

카와구치 슌스케의 여동생이 미츠코인 내맘대로 설정


w.비누꽃







"슌스케."


입밖으로 빠져나온 목소리는 반쯤 쉬어있었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경성의 햇살이 낯설었다. 

커튼을 치며 뒤돌아본 얼굴은 슌스케가 맞았다.


"슌스케. 나 어제 돌아왔어... 아침부터 무슨,"


내가 막 몸을 일으켜 앉은 침대 앞까지 휘적휘적 걸어오는 그 때문에 말을 끝내지 못했다. 


"동경으로 돌아가."

"어... 음..."


분명한 조선말로 말하며 슌스케는 허리를 굽혀 나와 눈을 맞췄다. 슬픔이 담겨있는 것 같아 그 눈빛을 외면하고 손에 잡힌 이불만 만지작거렸다. 그의 등 뒤로 문이 열리고 집사 아저씨가 갈아입을 옷을 의자 등받이에 조용히 걸쳐놓았다. 아저씨가 슌스케에게 허리를 굽히고 나간 뒤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슌스케를 지나쳤다.


"시완. 나 무시하지마."

"조선말이 많이 늘었다. 겨우 몇 달 못 본 사이에... 공부 열심히 했구나."

"네가 일단 돌아가 있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한다."

"너 그 말만 외운거지?"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일본어를 듣고 슌스케는 정곡을 찔린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잠옷을 벗는 내 등 뒤에서 그는 딱딱한 외국어로 따지듯 물었다.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답답해 미치겠어. 넌 아무런 의견이 없어? 정말로 미츠코랑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 위해 돌아온거야?"

"......"

"그리고 그 꼴보기 싫은 계집애는 잘생긴 내 친구랑 결혼한다고 하루종일 떠들고 있어."

"네 동생이야."


잠옷을 내려놓고 옷을 집어든 나를 슌스케가 등 뒤에서 껴안았다. 나보다 키가 큰 그가 얼굴을 맨 목덜미에 파묻자 깊이 내쉬는 한숨이 뜨겁게 느껴졌다. 나 역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깨를 감싼 팔을 풀기 위해 손을 올렸지만, 그 손까지 단단히 잡혀버렸다.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냥 가만히 놔두었다.


"네가 어떻게 알아서 할 건데... 사령관 각하의 뜻을 네가 어떻게 바꾼다고."


그가 현실을 깨닫도록 해 주는 건 내 역할이다. 카와구치 슌스케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의 아들이고, 대위이며 나의 오랜 친구다. 얼마나 오래됐냐면, 우리 아버지가 일본의 개가 되려고 열심히 뛰어다니던 그 시절부터.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은 학교를 다니며 가까이 지낸다 해도 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 둘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슌스케는 언제든 맘에 들지 않으면 나를 무릎 꿇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내게 친구 이상의 마음을 품었고 그 때문에 티내지 않으려 애써도 언제나 내게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선을 넘으려 할 때마다 다시 한 번 선을 확실히 긋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밴 나는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내가 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을 아버지께 추천하면 돼."

"우리 아버지한테 들었을 때는 그렇게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던데..."


슌스케는 파묻었던 얼굴을 들고 그대로 내 허리를 거칠게 잡아챘다. 내 몸은 다시 침대로 파묻혔고, 넘어지면서 꺾인 허리가 아파서 끙끙대는 내 앞에서 그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쉬며 발을 굴렀다.


"너는 결혼할 생각이구나. 난 네가 돌아오면, 너랑 머리를 맞대고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줄 알았어! 근데 너는 아무 생각 없이, 내 여동생이랑...! 너도 카와구치의 권력이 탐나는 거였나? 그래?"

"...슌스케. 나는 아무런 힘이 없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여동생이야! 너 나랑 가족이 되는거야. 정말 그래도 좋냐?"

"넌 내 제일 친한 친구야. 가족이 되는 게 싫을 이유가 없잖아."


이 말을 하며 나는 내 제일 친한 친구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싸늘한 정적이 흐르고 얼굴을 들자 잔뜩 상처받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모른 척 해야 했다. 나를 노려보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는 탁자에 놓여있던 도자기를 거세게 집어던졌다. 내 앞에서, 나에게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쨍강 하는 소리에 놀라 내 맨발 앞에 산산조각난 도자기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군화를 신은 발이 다가와 도자기 조각을 파삭파삭 밟고 섰다. 슌스케의 두 손이 내 어깨를 잡아 밀고, 그대로 입술이 부딪혀왔다. 완전히 눕혀진 내 몸을 슌스케가 짓눌렀다. 


누군가와 입술을 맞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자를 만나면 그 여자를 슌스케가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꼭 그 때문만도 아니었다. 여자에게 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자를 만나려 했던 적도 없었다.  나같은 민족반역자의 아들에게 그런 감정은 사치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슌스케를 친구 이상으로 바라본 적도 없었다. 사실은 그를 친구로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조선주둔군 사령관의 아들이고 나는 빼앗긴 나라의 백성이었으므로. 

상황 파악을 미처 하지 못한 몇 초 동안 나는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눈앞에 가득찬 슌스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감은 눈 아래로 눈물이 흘렀다. 마음이 조금 아팠다. 곧 입안을 거칠게 파고드는 혀와 내 입술을 깨무는 감촉을 느끼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으, 그만...!"


같은 남자임에도 군사 훈련을 받은 그와 나의 힘 차이는 컸다. 애써 버둥대려는 나를 아무렇지 않게 짓누르며 슌스케는 계속해서 내게 입을 맞췄다. 입 안이 헤집어지고 혀가 아프게 빨아당겨졌다. 한참 뒤에야 그는 떨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무섭니. 처음도 아닌데."

"무슨,"

"네가 내 옆에서 잘 때마다 입맞췄어. 너는 항상 세상모르고 잠들었잖아."


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말없이 고개를 돌려 외면한 나를 내려다보며 슌스케는 오른손으로 내 맨허리를 쓰다듬었다. 움찔하며 몸을 빼려는 나를 비웃듯 숨을 피식피식 내쉬던 그는 부드럽게 내 목덜미를 빨아들였다. 내가 순응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소름이 돋았다.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 슌스케의 뒷머리를 잡고 끌어냈다.


"하지 마!"

"아!"


그는 내 손을 뿌리치고 상체만 일으켜 내 몸에 그대로 앉아 나를 노려보았다.


"네 모르는 척도 지겹다."

"비켜."

"사랑해."

"난... 못 알아들었어. 비켜..."

"사랑해, 임시완."

"......"

"조선말로도 할 줄 알아. 시완아, 사랑해."


더이상 모른 척 넘길 수도 없게 그는 부딪혀왔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네가 안다면... 나는 아버지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네가 안다면.


"미안해, 슌스케. 미안하다."


내 어깨를 붙들고 있던 나머지 손이 미끄러졌다. 


"나는 너를... 한 번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 적 없어. 네가 나에게 잘해준 것들 다 정말 고맙지만...  나는 못 들은 걸로 할게. 비켜주라."

"시완."

"제발, 제발 그러지 마. 우리 친구잖아. 앞으로도, 가족이 되어도, 예전처럼, 아니 지금까지처럼 잘 지내자. 제발."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할게. 너도... 잊어.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슌스케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힘없이 밀려나는 그를 뒤로 하고 일어나 실내화를 신었다. 멀리 널부러진 옷 대신 가운을 걸쳐 입었다.


"우리가 친구라고?"


등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와 무릎에 힘이 빠지려 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곧 소름끼치도록 차갑게 변했다.


"너 역시 은혜를 모르는 조선인이구나."

"슌스케!"


황급히 몸을 돌리자마자 손바닥이 날아왔다. 나는 그대로 뺨을 얻어맞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너무 세게 맞아서 귀가 멍멍하고 눈물이 주룩 흘렀다.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나 서있던 슌스케는 군화를 신은 발로 내 배를 걷어찼다.


"아윽!"

"가족이 되어도 잘 지내? 건방진 조선인. 넌 우리 집에 네 애비처럼 개새끼로 팔려오는 거야."

"......"

"미츠코와 결혼해. 그리고 카와구치 본가로 들어와 살아."

"슌...스케."

"정략결혼을 하면서 다른 부부들처럼 살 수 있을거란 기대는 안 했겠지. 너 똑똑하잖아. 나를 이렇게 가지고 놀 만큼. 하지만 난 그 이상을 너한테 보여줄거다. 넌 미츠코의 남편이 되는 게 아니야. 널 갖는 건 나야."


나는 말없이 그의 발 앞에 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동경으로는 못 돌아가. 네 공부도 여기까지야.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진행한다."


슌스케는, 아니 우리는 이제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내 앞에 무릎 꿇어."


옆으로 누운 채로 눈만 들어 슌스케를 바라보았다. 얼마쯤 슬픈 빛을 띠었던 그 눈이 차가웠다.


"카와구치 대위의 명령이다. 무릎 꿇어, 임시완."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을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우정은 한쪽이 너그러이 있어줄 때만 가능한, 살얼음보다 아슬아슬하고 얄팍한 것이었음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존심 같은건 상하지 않았다. 이것이 처음부터 내 위치였으니까. 그냥 자조적인 웃음이 내 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바닥에 널부러진 도자기 조각 위로 무릎을 꿇었다. 아프게 박혀오는 것들은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통이었다. 제국의 개로 편안히 살아온 내가 지금부터 겪게 될 아픔은 우리 아버지가 내버리고 내가 모른척한 우리 민족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기에. 불구덩이에 던져지더라도 황송히 웃으면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슌스케는 잠시동안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어울리지 않게 순진하게 굴었어, 너한테는."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처음부터 너를 이렇게 가졌어야 했는데."


그리고 발로 내 허벅지를 짓눌렀다. 나는 원래부터 아픈 걸 잘 참지 못했다. 신음이 터지자 슌스케는 웃었다. 그는 발을 떼고 여전히 웃으며 나를 일으켰다. 피가 줄줄 흐르는 무릎을 하고 나는 질질 끌려가 침대에 처박혔다.


"지금부터 대 일본제국이 뭔지, 사내가 뭔지 가르쳐주지. 너한테 딱 어울리는 자리가 어딘지도."


내가 지은 죗값은 지금부터 치르게 될 거다. 나는 오래 전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슌스케도 웃었고, 나도 고개를 숙인 채 그가 보지 못하도록 웃었다.












피와 끈끈한 액체로 더러워진 침대보는 슌스케가 데려온 하인이 몰래 가지고 나갔다. 아마 은밀히 불태워질 것이다. 슌스케는 하인의 목에 총을 들이대는 것으로 말없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는 이 일을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고 싶어했다. 카와구치 사령관이 안다면 그의 아들의 앞길에 추문이 남기 전에 나를 죽일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온전히 자신만이 알고 가지려는 슌스케의 소유욕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말없이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제복을 처음처럼 다시 단정하게 갖춰 입은 슌스케는 나 대신 아까부터 바닥에 뒹굴던 내 옷을 집어왔다. 하인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자신이 직접 덮어놨던 이불을 걷어버리고, 내 몸에 아무렇게나 옷을 덮은 뒤 그는 담배를 태웠다.


"옷 정도는 일어나서 스스로 입어. 건방지게 굴지 마."


나를 등지고 앉아있던 슌스케는 고개만 돌려 나를 응시했다. 나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냥 아파서 눈물이 나는 거였다. 그는 다시 나를 외면했다. 그러다가 다시 손을 뻗어 나를 대충 일으켰다. 외출복은 결국 내게 입혀지지 못한 채 구석에 처박혔고 슌스케는 내게 유카타를 입히며 허리끈을 세게 묶었다. 내가 쓰러지듯 슌스케의 등에 기대자 그는 크게 두 번 헛기침을 했고, 밖에 서 있던 다른 하인이 들어왔다.


"다나카 소위를 데려와."

"네! 소위는 지금 정원에 계십니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다나카 소위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와 슌스케에게 경례했다. 해군 제복을 입은 키도 덩치도 큰 남자였다.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 드러난 이마가 강인해 보였다. 얼핏 조선인처럼 보였지만 내 착각일 것이다. 남자의 입에서 딱딱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본어가 흘러나왔다.


"카와구치 대위님."

"넌 처음 보지? 앞으로 한두 달 정도만 내 호위를 맡아 줄 다나카 소위다. 상해에서 만났고. 기차에서 한 잔 하다가 마음에 들어 곁에 두고 있지."


다나카 소위는 슌스케의 말에 기분 좋게 웃으며 나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제게도 큰 영광이지요."

"나는 볼일이 있으니 동경에서 돌아온 내 친구를 우리 집에 좀 데려가줬으면 해. 몸이 안 좋은데, 워낙 가까운 사이다보니 힘들어도 떨어져 있기가 싫다는군. 그리고... 곧 내 여동생과 결혼할 사람이니 나를 대하듯 대해줬으면 해."

"예."


다나카 소위의 경례를 받은 뒤 슌스케는 나를 한 번 돌아보고 방을 나갔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가시죠, 도련님."


말없이 늘어진 나를 보며 그는 실례. 하고 속삭인 뒤 나를 들쳐업으려 했다.


"악!"


하반신이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르자 다나카 소위는 놀란 듯 했다. 나는 그의 무릎으로 엎어졌다. 몸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봅니다."

"네..."


고개를 간신히 들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찌르르, 전기가 통하는 듯 했다. 그의 눈빛이 너무 강해서인가. 아니면 그냥 몸이 아파서인가. 그는 내 허리를 일으켰다. 그 역시 소위이니 나를 도련님이라 부르더라도 굳이 내게 이렇게까지 깍듯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슌스케의 친구여서 내게 정중히 구는 듯 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임시완입니다."

"조선 이름을 말씀하시네요."

"......"

"꼭 아가씨처럼 생기셨습니다. 댁으로 모셔다드려야 하니 잠시 아가씨가 되셔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그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나를 안아들었다. 놀라서 본능적으로 다나카 소위의 목을 감싸안은 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슌스케가 나가며 언질을 해 놓았는지 우리집의 하인들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소위가 직접 나를 들어 옮기다니, 개 치고는 대접이 후하다. 그는 나를 자동차의 뒷좌석에 내려놓고 자신도 옆에 앉았다. 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른하면서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과 마주하자 또 심장이 찌르르 떨려왔다.